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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金文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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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효기(孝起)
자(字)여공(汝恭)
호(號)백촌(白村)
생년1399(정종 1)
졸년1456(세조 2)
시대조선전기
본관김녕(金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관(金觀)
출신지충청북도 옥천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문기(金文起)
1399년(정종 1)∼1456년(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김녕(金寧). 초명은 김효기(金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충청북도 옥천 출신. 부친은 김관(金觀)이다.

1426년(세종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에 예문관검열, 1436년 10월에 사간원좌헌납이 되었다.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으나,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음이 인정되어서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를 마치라는 유시에 따라 이를 수행하는 공을 세웠다.

그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그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그뒤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들어 ‘사육신’이라 하였는데, 이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리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뒤, 1691년(숙종 17)에는 국가에서 공인하여 육신을 복관시키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도 복관되었으며, 1757년에는 충의(忠毅)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그는 삼중신(三重臣: 閔伸‧趙克寬‧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정조내각홍문관에 명령하여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문적을 널리 고증하게 하여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 되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가 내려진 것이다. 그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금릉군 지례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그런데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역에 그의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놓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벌어져 신문지상에 그들의 논설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秋江集
死六臣訂正論의 虛點(李載浩, 韓國史의 批正, 宇石出版社, 1985)

[집필자]

김성준(金成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