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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朴彭年)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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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수(仁叟)
호(號)취금헌(醉琴軒)
시호(諡號)충정(忠正)
생년1417(태종 17)
졸년1456(세조 2)
시대조선전기
본관순천(順天)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중림(朴仲林)
조부박안생(朴安生)
외조부김익생(金益生)
출신지회덕(懷德)
묘소서울 노량진

[상세내용]

박팽년(朴彭年)
1417년(태종 17)∼1456년(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 단종복위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회덕(懷德) 출신. 박안생(朴安生)의 손자이며, 박중림(朴仲林)의 아들이고, 모친은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는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 학사들은 모두 그 시대의 이름높은 선비들이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경술(經術)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는 성삼문(成三問)의 만류로 단념하였는데,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있는 동안 세조에게 올리는 일체의 문서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兪應孚)김질(金礩)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해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유응부박정(朴崝)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그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는 연회장소인 전내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하여 뒷날 관가(觀稼: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세조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이에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하여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라 하고 상감(上監: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하였는데도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정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비 박중림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박대년(朴大年)과 아들 박헌(朴憲)박순(朴珣)박분(朴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가족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이 단종복위운동이 있을 때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이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그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기니, 이것이 『추강집(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그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이르러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뒤 1758년(영조 34)에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삼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으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서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경술과 문장‧필법에 뛰어난 존재로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나 이와같은 문집이 전하지 않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하여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朴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석(表石)이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허적(許積)은 “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屍身)을 거둬 이곳 강남(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그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는데,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요(鍾繇)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공원으로 단장되었으며,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또한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莊陵誌
尤菴集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韓國繪畵大觀(劉後烈, 文敎院, 1969)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대표명박팽년(朴彭年)
팽년(彭年)
성명박팽년(朴彭年)
시호충정(忠正)
중수(仲叟)
취금헌(醉琴軒)

명 : "팽년(彭年)"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4惠嬪楊氏出丁丑謫卒諡貞烈○娶順天朴氏參判贈判書忠正公彭年女生一女
國朝編年v03實錄三問與朴彭年等謀復魯山君彭年謂礩曰事成則汝之妻父可爲領議政成三問等擧事之期屢違不諧礩乃泄於鄭昌孫昌孫卽同礩詣闕密啓曰礩與成三問等
紀年便攷v3惠嬪楊氏出○娶順天朴氏㕘判贈判書彭年
紀年便攷v7죠츨소냐名入筆苑選清白吏世祖受禪後為錦伯状啓皆書以巨不書臣字丙子謀復上王事泄與父及四弟一子并被禍上曰彭年三問等當世之亂臣後世之忠臣肅宗辛未復官致祭贈謚忠正英祖戊寅贈吏判○妻為婢守節終身子珣妻李氏以其親家在
紀年便攷v7男當以卑産代其死及産主男婢女易而子之名曰朴婢成宗朝珣友婿李克均按本道招見抆淚使之自首上特宥之改名壹珊彭年玄孫繼昌甞於彭年忌辰夢見六人来止於祠門外覺而即供六位之祀四兄弟文科弟耆年見下引年大年弟引年字龜叟號景
紀年便攷v7倒玉危不樂何為長不楽賡歌醉飽太平時世祖命懸板府中世祖吏金礩以酒徃獄中歌太宗歌以試之二問歌圃隠歌以答之彭年及塏皆製短歌以答之曰金生麗水라들물마다金이나며玉出崑岡이라들뫼마다玉이나며女必従夫라들님마다죠
紀年便攷v7一時而三問文瀾豪縦而短於詩緯地長於對䇿䟽章而不知詩誠源天才夙成而其覧不慱塏清穎英發詩亦清絶然濟軰皆推彭年為集大成謂其經學文章筆法俱善也世祖為領相宴府中彭年有詩曰廟堂深䖏動哀絲萬事如今捴不知柳綠東風吹細細花
紀年便攷v7誠源天才夙成而其覧不慱塏清穎英發詩亦清絶然濟軰皆推彭年為集大成謂其經學文章筆法俱善也世祖為領相宴府中彭年有詩曰廟堂深䖏動哀絲萬事如今捴不知柳綠東風吹細細花明春日正遲遲 先王大業抽金櫃聖主鴻恩倒玉危不樂何為
紀年便攷v7朴耆年順天人彭年弟字松叟號東齋 文宗辛未登增廣歴南床端宗癸酉選湖堂官止修撰
紀年便攷v7佩劒欲入明澮曰己今雲劒勿入勝退欲撃殺明澮等子三問曰世子不来雖殺明澮無益也及事敗三問臨刑上問其黨三問曰彭年等及吾父耳上更問答曰吾父尚不諱况他人乎父子竟被禍六臣復官時同為復官還給田民之在連山者贈領相謚文肅
紀年便攷v7彭年耆年引年見下
紀年便攷v7使於上王前是時與成勝同為雲劒應孚曰上與世子吾當之其餘君等䖏之旋有世子勿入侍雲劒亦勿入之令應孚猶欲入撃彭年三問固止之曰不如他日俟上與世子同䖏而舉之事成矣應孚曰事貴神速世子雖在本宮謀臣賊子皆從首陽到此今日盡誅
紀年便攷v8彭年
紀年便攷v8時三問父勝與俞應孚為雲釰彭年䓁欲因此入侍而事舉
紀年便攷v8之此實賢人也希顏遂得免時誠源在成均館時帶司藝職聞三問事卽還家與妻酌酒飮訣仰卧自刎俄而吏来取屍磔之於是彭年塏三問緯地應孚朴仲林彭年父朴大年蓍年永年引年皆彭年弟權自慎上王外従金文起成勝三問
紀年便攷v8彭年
紀年便攷v8變上愛彭年之才隂使人告曰汝降我而諱其謀則得生彭年笑而不荅稱上必曰進賜上怒曰汝旣稱臣食祿於予今不稱臣何也彭年曰我
紀年便攷v8變上愛彭年之才隂使人告曰汝降我而諱其謀則得生彭年笑而不荅稱上必曰進賜上怒曰汝旣稱臣食祿於予今不稱臣何也彭年曰我為上王之臣拜忠清監司啓目於進賜未嘗一稱
紀年便攷v8見雲釰勿入侍應孚猶欲入撃彭年三問固止之曰非萬全計不如俟他日舉之成事云
紀年便攷v8上愛彭年之才隂使人告曰汝降我而諱其謀則得生彭年笑而不荅稱上必曰進賜上怒曰汝旣稱臣食祿於予今不稱臣何也彭年曰我為上王之臣拜忠清監司啓目於進賜未嘗一稱臣亦不食祿於是較其啓目果旡一臣字書以巨字受祿不食封閉一庫應
國朝捷錄v01淸甫與彭年同日死季疇子韓山人忠簡公
國朝捷錄v01彭年
國朝捷錄v01彭年兄修撰
郯述v01丙子進 父彭年 順天緣坐
國朝人物志v1對曰宜用思慮深長不喜紛擾者朴仲林其人也上曰然遂以爲大司憲甲戌爲吏曹判書丙子與子彭年謀復上王事覺同死臨刑諸子泣告曰欲忠於君有違於孝仲林笑曰事君不忠非孝也遂就戮正
國朝人物志v1重試性沈靜寡默以小學律身終日端坐衣冠整肅文章沖澹筆法鍾王集賢學士莫不擅名一時皆推彭年爲集大成慵齋叢話有田廣州可種五六斗其友責之曰祿足以代耕何必置田彭年卽賣之靜菴
國朝人物志v1年及成三問止之曰公之雲劍不用天也不如俟後日應孚曰事貴神速今日奉上王號令時不可失也彭年等固不可遂止事覺上問汝欲何爲應孚曰欲復故主不幸爲奸人所發復何爲哉顧謂三問等曰人謂書
國朝人物志v1明澮安在曰在闕鞫囚保揮手曰令公殺此人當爲萬古罪人卽拂衣去明澮以聞上鞫之對曰素知三問彭年之爲正人君子故有是言上命轘之仍問此何人左右曰鄭夢周之孫上遽止之曰忠臣之後也
國朝人物志v3字時應號梅隱堂順天人彭年弟景春軒引年八代孫掌令花遷堂春茂子有文武全才從父倡義討倭常爲先鋒樹勳武科歷典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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