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제(南泰齊)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A8D0DCC81CB1699X0 |
자(字) | 관보(觀甫) |
호(號) | 담정(澹亭) |
호(號) | 학야(鶴野) |
시호(諡號) | 청헌(淸獻) |
생년 | 1699(숙종 25) |
졸년 | 1776(정조 즉위)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의령(宜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남필명(南弼明) |
조부 | 남치훈(南致熏) |
외조부 | 신후재(申厚載) |
저서 | 『담정유고』 |
공신호 |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

[관련정보]
[상세내용]
남태제(南泰齊)
1699년(숙종 25)∼1776년(정조 즉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진(元鎭)‧관보(觀甫), 호는 담정(澹亭)‧학야(鶴野).
조부는 도승지 남치훈(南致熏)이고, 부친은 공조좌랑 남필명(南弼明)이며, 모친은 한성판윤 신후재(申厚載)의 딸이다.
1723년(경종 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7년(영조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8년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죄인 국문 등에 신속히 대처한 공으로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뒤 전적‧예조좌랑‧지평‧병조좌랑 등을 거쳐, 1734년 정언에 이르러 당시 영상인 심수현(沈壽賢)을 탄핵하다가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좌천되었다. 뒤에 조현명(趙顯命)의 주청으로 1735년 장악원첨정을 시작으로 필선‧장령‧정언‧지제교‧헌납‧집의‧수찬‧교리 등의 대각(臺閣)을 두루 역임하였다.
당시 기강퇴폐(紀綱頹廢), 재용낭비, 풍속괴패,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논쟁 등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유배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능력을 인정받기도 하였으며, 1743년 병조참의‧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형조참의‧강화유수‧형조참판‧호조참판‧한성부윤‧대사헌‧대사성‧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그뒤 1760년에 자헌(資憲)으로 승계하여 지돈녕부사‧한성판윤‧내의원제조를 거쳐 정헌(正憲)으로 승계, 형조판서‧예조판서‧세자우빈객‧도총관‧경기감사‧홍문관제학을 거친 뒤, 1767년에는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나이 70이 되자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숭록(崇祿)으로 승계한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성품이 단정하고 스스로 행동을 잘 지켜 관직생활 50년 동안 파당적인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문장이 우아하고 시문에 화실(華實)이 구비되었으며, 제자백가에도 통달하였다.
저서로는 『담정유고』가 있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조부는 도승지 남치훈(南致熏)이고, 부친은 공조좌랑 남필명(南弼明)이며, 모친은 한성판윤 신후재(申厚載)의 딸이다.
1723년(경종 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7년(영조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8년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죄인 국문 등에 신속히 대처한 공으로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뒤 전적‧예조좌랑‧지평‧병조좌랑 등을 거쳐, 1734년 정언에 이르러 당시 영상인 심수현(沈壽賢)을 탄핵하다가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좌천되었다. 뒤에 조현명(趙顯命)의 주청으로 1735년 장악원첨정을 시작으로 필선‧장령‧정언‧지제교‧헌납‧집의‧수찬‧교리 등의 대각(臺閣)을 두루 역임하였다.
당시 기강퇴폐(紀綱頹廢), 재용낭비, 풍속괴패,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논쟁 등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유배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능력을 인정받기도 하였으며, 1743년 병조참의‧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형조참의‧강화유수‧형조참판‧호조참판‧한성부윤‧대사헌‧대사성‧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그뒤 1760년에 자헌(資憲)으로 승계하여 지돈녕부사‧한성판윤‧내의원제조를 거쳐 정헌(正憲)으로 승계, 형조판서‧예조판서‧세자우빈객‧도총관‧경기감사‧홍문관제학을 거친 뒤, 1767년에는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나이 70이 되자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숭록(崇祿)으로 승계한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성품이 단정하고 스스로 행동을 잘 지켜 관직생활 50년 동안 파당적인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문장이 우아하고 시문에 화실(華實)이 구비되었으며, 제자백가에도 통달하였다.
저서로는 『담정유고』가 있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柯汀集
純祖實錄
國朝榜目
柯汀集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명 : "태제(泰齊)"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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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