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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양래(尹陽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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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형(季亨)
호(號)회와(晦窩)
시호(諡號)익헌(翼獻)
생년1673(현종 14)
졸년1751(영조 27)
시대조선중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이(尹理)

[상세내용]

윤양래(尹陽來)
1673년(현종 14)∼1751년(영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계형(季亨), 호는 회와(晦窩). 경주부윤 윤이(尹理)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 진사를 거쳐, 170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에 초임되었는데, 이때 글씨를 빨리 써서 비주서(飛注書)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뒤 지평정언 등을 역임하고, 1716년 문학필선헌납집의를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보덕(輔德)을 지냈다.

1720년 승지병조참의우부승지를 거쳐 1721년(경종 1) 충청도관찰사로 재직중에 왕명을 어겨 효수형을 받게 된 박세명(朴世明)을 두둔하였다는 죄로 파직, 국문(鞫問)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어 동지 겸 주청부사(冬至兼奏請副使)청나라에 갔다. 다음해 청나라에 가서 경종의 병약을 발설하였다는 죄목으로 파직, 갑산에 위리안치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승지가 되고, 이어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간으로 재직중 윤심형(尹心衡)의 논척(論斥)을 받고 외보(外補)로 영월부사로 나갔다가 곧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뒤 안동부사를 거쳐 1729년 예조와 병조의 참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고 다음해 함경도관찰사, 1732년 한성부우윤경상도관찰사도승지평안도관찰사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대사헌을 지냈다.

1741년(영조 17) 좌참찬을 받아 아경(亞卿)의 지위에 올랐다.

1743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1746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을 때에 유생 60여명과 연명상소로 소론 박문수(朴文秀) 등이 탕평론을 벌임에, 신임사화에 관련된 소론들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이해에 판돈녕부사로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만년에 노론으로서 분란을 일으켰으나, 경사에 밝고 글씨를 잘 썼다. 글씨로는 「영상윤인경비(領相尹仁鏡碑)」와 「엄흥도묘갈(嚴興道墓碣)」 등이 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知守齋集
辛壬紀年提要

[집필자]

유병용(兪炳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