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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필(金東弼){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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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직(子直)
호(號)낙건정(樂健亭)
시호(諡號)충혜(忠惠)
생년1678(숙종 4)
졸년1737(영조 13)
시대조선중기
본관상산(商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유(金濡)
저서『인접설화(引接說話)』

[상세내용]

김동필(金東弼)
1678년(숙종 4)∼1737년(영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자직(子直), 호는 낙건정(樂健亭).

부친은 진사 김유(金濡)이다.

1704년(숙종 30)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후, 1707년부터 사서정언지평문학부수찬필선수찬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보덕으로 있을 때 당시 왕세제(王世弟)로 있던 영조를 모해하려는 환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을 탄핵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1722년부터 수찬응교수원부사대사간승지를 역임하면서 소론 온건파의 입장에 서서 강경파인 김일경(金一鏡)의 가혹한 신임사화 처리를 탄핵하다가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좌천되었다.

1723년에 승지, 다음해에 경상감사를 지냈고, 1725년 영조 즉위 후에 노론이 집권하자 벼슬이 깎이게 되었으나, 왕의 각별한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1727년 도승지한성판윤을 역임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협조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남한순무 겸 동로경략사(南漢巡撫兼東路經略使)로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난이 평정된 뒤에 이조판서공조판서를 지냈다.

1729년(영조 5) 동지정사(冬至正使)북경에 다녀왔고, 이어 병조판서호조판서지의금부사동지경연사를 지내고 1732년부터는 다시 한성판윤좌참찬판돈녕부사형조판서판의금부사예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죽은 뒤 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혜(忠惠)이다.

저서로는 『인접설화(引接說話)』가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