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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성(李德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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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득보(得甫)
호(號)반곡(盤谷)
호(號)지비자(知非子)
생년1655(효종 6)
졸년1704(숙종 30)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후영(李後英)
창녕조씨(昌寧曺氏)
외조부이문수(李文秀)

[상세내용]

이덕성(李德成)
1655년(효종 6)∼1704년(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득보(得甫), 호는 반곡(盤谷)지비자(知非子).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8대손으로, 이후영(李後英)의 아들이며, 모친은 창녕조씨(昌寧曺氏)호조참판 이문수(李文秀)의 딸이다.

1677년(숙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82년 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부정자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현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의정부사록의금부도사성균관전적공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1684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85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이때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다가 순안현령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병조정랑을 거쳐 다시 정언지평이 되어 국정 전반에 걸친 시폐(時弊)를 개혁하기 위한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뒤 병조정랑사복시정을 거쳐 1687년 동래부사가 되어 내상(萊商)들의 잠매행위(潛賣行爲)와 왜인의 불법을 징치하는 데에 크게 힘썼다. 기사환국 때에 일시 사직하여 향리에 돌아갔다가, 해주목사병조참지의주부윤장례원판결사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9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동부승지예조참의가 되었다.

1699년 동지부사청나라에 가서 사서(史書)를 구입하다 금령에 걸려 파직되었다. 다시 형조참의무주부사강원감사형조참의를 거쳐 1704년 충청감사가 되었으나, 재직중에 병으로 죽었다.

특히 글씨에 능하여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槿域書畵徵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