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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원(李厚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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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심(士深)
호(號)우재(迂齋)
시호(諡號)충정(忠貞)
생년1598(선조 31)
졸년1660(현종 1)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욱(李郁)
외조부황정욱(黃廷彧)
공신호정사공신(靖社功臣)

[상세내용]

이후원(李厚源)
1598년(선조 31)∼1660년(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

광평대군의 7세손으로, 군수 이욱(李郁)의 아들이며, 모친은 판서 황정욱(黃廷彧)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다. 같은해 태인현감이 되고 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이의 수습에 앞장섰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사로 변란에 임하였는데, 이듬해 포로를 잡은 공로로 녹훈되었으나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어 단양군수태안군수를 역임한 뒤 중앙으로 돌아와 한성부서윤이 되었다.

그뒤 1635년 익산군수로 나갔으며, 이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김상헌(金尙憲) 등 제신의 천거로 지평이 되었으며, 문학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되어 김류(金瑬) 등이 왕을 강화로 모시려 하자 남한산성을 적극 고수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때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화론을 펴자, 죽기를 각오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39년 승지가 되고 이어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왕이 그를 곁에 두고자 하여 병조참지로 임명하였다.

그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민력(民力)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士風)을 변경시켰으며, 군정(軍政)을 닦는 데 힘썼다. 이어 강화부유수가 되고 1642년 대사간을 역임한 뒤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임하게 되자 이를 기화로 심복의 장사(壯士)들을 호위대(扈衛隊)에 두고 전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 등과 모의,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 난의 수습에 적극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고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며, 1646년 형조참판이 되어 회명연(會盟宴)에 참여하였다.

1650년(현종 1) 효종의 북벌모의에 참모가 되어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등 북벌계획에 앞장섰다.

그뒤 1653년 도승지『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1655년 예조판서로서 추쇄도감제조(推刷都監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 강화를 방비하게 하였고, 또한 장악원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을 개간하여 사고(史庫)에 분장(分藏)하게 하였다. 이어 한성부판윤, 형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며 곧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때 송시열(宋時烈)이조판서, 송준길(宋浚吉)병조판서에 임명하는 등 인재등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는 세자좌부빈객지경연사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청개(淸介)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다. 선(善)을 좋아하여 능변으로 악을 질시하였으며, 바쁜 관직생활중에도 경사(經史)를 공부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85년(숙종 11) 광주(廣州)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宋子大全
淸選考
增補文獻備考
大東編年
明陪臣考

[집필자]

임영정(林英正)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