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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李德泂)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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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백(遠伯)
호(號)죽천(竹泉)
시호(諡號)충숙(忠肅)
생년1566(명종 21)
졸년1645(인조 23)
시대조선중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오(李澳)
증조부이언호(李彦浩)
외조부민원종(閔元宗)
저서『죽창한화(竹窓閑話)』
저서『송도기이(松都記異)』

[상세내용]

이덕형(李德泂)
1566년(명종 21)∼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관찰사 이언호(李彦浩)의 증손으로, 호군 이오(李澳)의 아들이며, 모친은 민원종(閔元宗)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에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1597년에서 1608년까지 봉교정언지평수찬부교리헌납전적‧문학‧집의교리부응교사간사예사섬시부정응교시강원보덕사도시정(司䆃寺正) 등을 거쳤다.

광해군 때에도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京官職)과 나주목사전라감사황해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특히, 광해군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아니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어지러운 세태가 극도에 달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려고 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을 당하여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본 능양군(綾陽君: 仁祖)이 그를 충신이라고 판단하여 반정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그를 앞세워 반정을 보고하였으며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인조 때는 한성부판윤이 되어 이괄(李适)의 난 진압에 공로가 있어 숭정(崇政)으로 승계하고,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다. 환도 후 숭록(崇祿)으로 승계하여 예조판서판의금부사지돈녕부사우찬성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창한화(竹窓閑話)』『송도기이(松都記異)』 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人物志
燃藜室記述
公私見聞錄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