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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굉(金宇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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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부(敬夫)
호(號)개암(開巖)
생년1524(중종 19)
졸년1590(선조 23)
시대조선전기
본관의성(義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희삼(金希參)
곽씨(郭氏)
출신지경상북도 성주
저서『개암집』

[상세내용]

김우굉(金宇宏)
1524년(중종 19)∼1590년(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巖). 경상북도 성주 출신. 부친은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며, 모친은 곽씨(郭氏)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2년(중종 37)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진사시에도 역시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뒤 주서(注書)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典籍), 예조병조좌랑정랑, 지제교(知製敎)정언(正言)헌납(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 6) 부수찬, 157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김우옹(金宇顒)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수를 지어 주며 이별하였다 한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옥송(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상주 속수서원(凁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개암집』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石潭日記
陶山及門諸賢錄

[집필자]

송정현(宋正炫)

성명 : "김우굉(金宇宏)"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1之鷹大也金孝元徐仁元金應南金瞻洪進倡禍之指嗾也李山海應南之妻娚外示忠厚內藏陰兇朴承任妨賢李塈妬賢嫉能金宇宏陰險凶邪金貴榮阿諛苟容洪渾巧詐陰譎洪汝諄奸匿暴戾鄭凞績宜頑無識禹性傳陰險麤鄙李景㟽誕妄邪毒李徵兇頑淺
寒臯觀外史v21宲問于 三公将释之三公畏士論不敢對上乃命释之政院 啓以贜汙罪重不可軽释爭之至四啓上乃怒命罷 入直承旨金宇宏宋應漑而盡逓都承旨李山海以 下天威大震闕中驚動明日両司玉堂爭之不䏻得 三公亦請勿罷逓承旨而上不泛銖世
寒臯觀外史v22持平鄭 述上疏辭職不允無何因事逓職述治邑政聲赫然以治行髙第陞品入拜憲官而未及有所施爲人想望風釆大司諌金宇宏因事避嫌駁罷刑曹正郞魚雲海宇宏尋被劾逓宇宏曽與郭嗣元訟潮田有年與宇宏同力者多士大夫而竟不克訟㴱懷忿恨
寒臯觀外史v23字彥平文定王后之弟官左相 緇徒填滿山谷大妃因齋素累日以至不諱故有是 䟽四方儒士皆通檄来䟽慶尚道䟽頭則金宇宏是 葢表表可稱者也
錦營公案守觀察使 金宇宏 辛巳 官止副學
郯述v01金宇宏
文獻攷略v4洓水書院孝宗丁酉建申佑按廉使孫仲暾景節公左參贊金宇宏開岩副學趙靖字安仲號黔澗豊壤人奉常正贈吏議
國朝人物志v2曹佐郞時嶺南有處事上命勿拘文蔭擇送廷議歸之遂除慶尙都事爲刑曹佐郞守正不撓先是金宇宏與郭嗣元訟田不克未幾宇宏拜諫長雲海語人曰金公爲刑官欲以私怨罪人宇宏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