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보우(普雨)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BCF4C6B0FFFFB1509X0
호(號)나암(懶庵)
생년1509(중종 4)
졸년1565(명종 20)
시대조선전기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저서『허응당집(虛應堂集)』
저서『나암잡저(懶庵雜著)』
저서『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
저서『권념요록(勸念要錄)』

[상세내용]

보우(普雨)
1509년(중종 4)∼1565년(명종 20). 조선 중기의 고승.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 보우는 법명이다.
1. 가계와 수학
가계 등은 미상이며,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그뒤 금강산일대의 장안사(長安寺)‧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련을 쌓고 학문을 닦았다.

6년 동안의 정진(精進) 끝에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법력(法力)을 얻었고, 그밖에도 대장경(大藏經)을 모두 섭렵하는 한편 『주역』도 공부하였다.

당시 그를 지도해준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나 여러가지 문헌을 종합해보면,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견성암(見性庵)에 있던 지행(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뒤 탁월한 수양력과 불교‧유교에 관한 뛰어난 지식을 바탕으로 유명한 유학자들과도 깊이 사귀었다. 그 중에서도 재상이었던 정만종(鄭萬鍾)과는 특별한 사귐이 있었다.

정만종보우의 인품과 그 도량이 큼을 조정과 문정대비(文定大妃)에게 알리게 됨에 따라, 뒷날 문정대비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2. 금유생상사지법
한때 그는 함경도 함흥에 머물고 있었는데, 1548년(명종 3) 9월에 함흥을 떠나 호남으로 내려가는 도중 병을 얻게 되어 경기도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의 차안당(遮眼堂)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이때 문정대비로부터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가라는 부름을 받고, 그해 12월 15일에 부임하였다. 봉은사 주지에 취임하여 제일 먼저 문정대비로 하여금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능침(陵寢)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물건을 훔친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황언징(黃彦澄)을 처벌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에는 방(榜)을 붙여 잡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킴으로써 유생들의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조선시대에 와서 처음 있는 일로서 유생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끝내는 이 문제가 조정에까지 비화되었다. 문정대비가 이러한 조처를 한 것은 보우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 하여 1549년 9월 20일에 성균관 생원인 안사준(安士俊) 등은 요승 보우의 목을 베고 황언징을 풀어달라는 내용의 강력한 건의를 조정에 올렸다.

그러나 문정대비는 “이유 없이 승려들을 괴롭히고 법당에 난입하여 도둑질하는 행위를 처벌하지 않으면 뒷날의 폐단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문정대비보우와 유생들 사이에는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었다. 봉은사와 봉선사에 붙여진 방을 계기로 하여 그뒤 전국의 각 사찰에는 모두 이러한 공고문이 붙여져 보호를 받게 되었다.
3. 선교양종 부활
1550년 12월 15일에 문정대비로 하여금 선교(禪敎)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게 함으로써, 다음해인 1551년 5월에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다.

그리하여 6월 25일에는 봉은사가 선종의 본사(本寺)로, 봉선사가 교종의 본사로 지정되었고, 보우는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로 임명되었다.
4. 도첩제도 부활
같은해 11월에 도승시(度僧試)를 실시하게 하여 전국 승려들의 도첩제도(度牒制度)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 도첩제의 부활에 따라 전국의 26여 승려들이 정전(丁錢)없이 도첩을 받게 되었다.

또 1552년 4월에는 승려 과거시험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1504년(연산군 10)에 폐지되었던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부활시켰다. 선교 양종과 승과제도가 부활됨으로써 승려들의 자질이 향상되었음은 물론 휴정(休靜)유정(惟政) 등과 같은 고승들이 발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생들은 선교 양종과 도첩제‧승과제의 폐지를 요구하고, 보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그리하여 승정원홍문관예문관사헌부 등에서 매일 번갈아 상소를 하였고, 좌의정이 백관을 인솔하여 계(啓)를 올리는가 하면 성균관 학생들은 모두 종묘에 고(告)하고 성균관을 비우기까지 하였다.

선교 양종을 부활하라는 문정대비의 비망기가 내려진 뒤 6개월 사이에 상소문이 무려 423건이나 되었고,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것이 75계(啓)나 되었다.

그러나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佛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5. 활동
각종 제도적 장치의 결과로 종단이 안정된 기반을 가지게 된 1555년 9월에 보우는 판사직과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의 청평사(淸平寺)에서 내적인 수양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종단과의 관계는 끊을 수가 없었다. 청평사에는 교종판사‧선종판사‧어사 등이 방문하였으며, 종단의 일각에서 선종‧교종의 대선(大選)들이 자리다툼을 하게 되자 1560년에 다시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운부사(雲浮寺)에서 왕자의 태봉(胎峰)이 있는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 사원을 증축한 일이 있게 되자 이 사건에 연루되어 판사직을 박탈당하고 봉은사를 물러나게 되었다.

그뒤 세심정(洗心亭)에 머물면서 수행하였고, 같은해 12월 19일에 다시 선종판사로 임명되어 봉은사에 머물렀다.

그뒤 회암사 중창사업에 착수하여 1565년 4월에 끝내고, 그달 5일에는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설하였다.
6. 이이의 상소와 유배
그러나 4월 7일에 문정대비가 죽고, 대비의 장례를 마친 유생들은 곧바로 보우의 배척과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잇따른 상소에 명종은 보우의 승직을 박탈하고 서울 근교의 사찰 출입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온적인 처사에 만족할 수 없었던 전국의 유생들은 물론 정승들까지 보우를 죽일 것을 건의하자 보우는 한계산 설악사(雪岳寺)로 은거하였다. 한 승려의 고발로 은거처를 다시 떠났으나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것을 주장함에 따라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보우는 1565년 6월 12일에서 7월 28일 사이에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보우의 죽음이 서울에 알려진 것은 10월 15일이었다.
7. 평가와 저술
보우는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았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허응당집(虛應堂集)』 3권과 『나암잡저(懶庵雜著)』 1권,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 1권, 『권념요록(勸念要錄)』 1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虛應堂集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7)
李朝佛敎中興運動과 그 性格(姜喆鍾, 全北大學校論文集 第2輯, 1958)
普雨大師의 思想(徐閏吉, 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論叢 韓國佛敎思想史, 圓光大學校, 1974)

[집필자]

서윤길(徐閏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