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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각(鄭彦慤)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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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근부(謹夫)
생년1498(연산군 4)
졸년1556(명종 11)
시대조선전기
본관해주(海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희검(鄭希儉)

[상세내용]

정언각(鄭彦慤)
1498년(연산군 4)∼1556년(명종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근부(謹夫). 진사 정희검(鄭希儉)의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537년 박사에 이어 정언지평장령교리응교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직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옹원정검상사인 등을 지냈고, 1547년 부제학으로 재임시 경기도 양재역(良才驛)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세를 자행(恣行)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 이기정순붕(鄭順朋) 등에게 알림으로써 벽서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을사사화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봉성군(鳳城君: 중종의 아들)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 등을 죽이고, 권벌(權橃)이언적(李彦迪) 등 20여명을 유배시킴으로써 윤원형(尹元衡)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그 권세를 빌려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다.

도승지판결사를 거쳐 1551년 전라도관찰사로서 이열(李悅)의 노비를 약탈하여 파직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등용,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56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낙마하여 비참하게 죽었다.

1570년(선조 3) 관작이 추탈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朝野輯要
大東野乘

[집필자]

이범직(李範稷)

명 : "언각(彦愨)"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震乘總v4彦愨獨啓論林亨秀乃賜死
龍問門答v2曰臣之女從夫歸全羅道臣送至良才驛見壁□存以朱書之曰女主執政於上奸臣弄權於下國之將亡可立而待也云云世傳彦愨送女子暗使書之而有此啓云云文定召仁鏡芑磁順朋元衡等下彦慤所進壁書仁鏡等啓曰此書非迷劣者所爲也近來邪說
龍問門答v2不顧是非以發身爲急初爲奴使於芑輩有奴主之稱後爲父事於李樑有父子之號白休庵仁傑嘗曰明胤一身百千億化身也彦愨墮馬足掛鐙間肉破骨碎成一肉泥而斃時人快之曰報應之理速矣芑其侄元楨數曰叔父之事書之史策則後世之人謂之如
大事編年v5丁未二年九月副提學鄭彦愨宣傳官李櫓以一封書入啓曰臣彦愨女于從夫歸全羅道送至良才驛見壁上有書關重國家故取來封進傳曰此不得志而怨上者所爲也命招三公尹仁鏡李苞鄭
大事編年v5重國家故取來封進傳曰此不得志而怨上者所爲也命招三公尹仁鏡李苞鄭順朋及許磁閔齊仁尹元衡金光準林百齡等下彦愨所進書示之以朱書曰女主挽政於上奸臣李苞等弄權於下國之將亡可立而待豈不寒心哉云云傳曰近來災變極多又有如
大事編年v5付處生員許忠吉言於館中曰李德應不能忍杖伏招而死乃虛事也豈其實乎請拿問答曰依□今在遠方只有命脈不可加罪彦愨又獨啓曰林亨秀與任同里閈爪牙腹心每日元衡嘗殺大言於稠中只爲竄謫似輕歇乃命賜死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