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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응(李世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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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국보(國甫)
호(號)안재(安齋)
호(號)수옹(睡翁)
시호(諡號)양간(襄簡)
생년1473(성종 4)
졸년1528(중종 23)
시대조선전기
본관함안(咸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계통(李季通)
공신호정국공신(靖國功臣)

[상세내용]

이세응(李世應)
1473년(성종 4)∼1528년(중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반정공신.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공보(公輔) 또는 국보(國甫)(주1)
이세응의 등과 기록인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奎106])과 『홍치 9년 병진 윤3월 초3일 생원방(弘治九年丙辰閏三月初三日生員榜)』[보물 제896-2호]에는 자가 公輔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가 "국보"로 되어 있는 문헌도 있다. 『한고관외사(寒臯觀外史)』[장서각 K2-308] 1권의 弘治甲子燕山 기사에는 "...世應字國寶咸安人官左尹謚襄簡..."로, 『성호보휘(姓號譜彙)』[K2-1759] 2권 함안이씨편에는 "安齋李世應字公輔副正季通子..."로 되어 있는데 公輔를 삭제하고 國甫가 첨기되어 있다. "국보"에 대해 일단은 성호보휘를 따라 國甫로 하나, 國寶, 國甫, 國輔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 호는 안재(安齋)수옹(睡翁).

사재감부정 이계통(李季通)의 아들이다.

1496년(연산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01년에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장악원직장에 임명되고, 봉상시주부에 올랐으며, 정언으로 발탁된 뒤 이조좌랑병조정랑춘추관기주관, 의정부 검상사인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차례로 거쳤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내자시부정(內資寺副正)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사간원사간으로 옮겨지자 당시의 권신 유자광(柳子光)을 탄핵하여 귀양보내고, 1510년(중종 5)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병조참지가 되었으며, 뒤이어 승정원동부승지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을 지냈으며,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토호들의 작폐를 엄금하여 칭송을 받았다.

이어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병조참의우부승지를 거쳐 1518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승진, 함안군(咸安君)에 봉하여지고,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충청경상도 세곡(稅穀)의 집산지인 충주에 창고가 없어 노적된 곡식 관리와 수송에 막대한 지장이 있음을 알고 경상도관찰사 김안국(金安國)과 의논, 충주 가흥창(可興倉) 건물을 축조하였다.

그해말 정조사(正朝使)명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가흥창 설립 당시 손해를 보게 된 상인들의 모함을 받아 상호군으로 물러났다가 1519년 판결사로 서용되고, 뒤이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한성부우윤도총부부총관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다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는데 과로로 순직하였다.

효성이 뛰어나고 청렴결백하여 일찍이 중국사신으로 다녀올 때 요동(遼東)에 이르러 일행이 사사로이 무역한 물건들을 적발, 소각하였다. 시호는 양간(襄簡)이다.

저서로 『안재역설(安齋易說)』이 있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寒臯觀外史
성호보휘(姓號譜彙)

[집필자]

정만조(鄭萬祚)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8-28자 국보의 근거가 되는 참고문헌 한고관외사 추가.[수정자:이재옥][수정자: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