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선(朴仲善)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C911C120B1435X0 |
자(字) | 자숙(子淑) |
시호(諡號) | 소양(昭襄) |
생년 | 1435(세종 17) |
졸년 | 1481(성종 12)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순천(順天)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박거소(朴去疎) |
외조부 | 심온(沈溫) |
공신호 | 적개공신(敵愾功臣) |
공신호 | 정난익대공신(靖難翊戴功臣) |
공신호 | 좌리공신(佐理功臣) |
[상세내용]
박중선(朴仲善)
1435년(세종 17)∼1481년(성종 1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자숙(子淑).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박거소(朴去疎)의 아들이고, 모친은 청송심씨로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며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스스로 스승을 찾아 공부하였고, 특히 무예에 뛰어났다.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에 들어갔다가 부호군(副護軍)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고, 1460년(세조 6) 7월 무과에 장원하여 훈련원부사(訓鍊院副使)가 되었다.
이어 훈련원지사(訓鍊院知事)‧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역임하고 곧 지병조사(知兵曹事)가 되었다.
1463년 병조참의를 거쳐 1466년에 병조참판이 되어 오위(五衛)의 부총관(副摠官)을 겸하였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휘하의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서 황해도의 관군을 이끌고 문천(文川)으로 들어가 정토에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9월 평안중도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호조판서에 임명되고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1468년 10월 남이(南怡)의 옥사(獄事)에 공을 세워 정난익대공신(靖難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재임되어 서정(西征)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7월 다시 평양군으로 봉해지고 10월 전라도 포도주장(捕盜主將)이 되어 당시 창궐하던 도둑떼의 소탕에 공을 세웠다.
1471년 3월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4월 영안북도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1476년 3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윤2월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들어와서 도총관이 되었다.
1477년 10월 문신들이 그를 ‘불해문묵(不解文墨)’이라고 반대하는데도 이조판서에 발탁되었으며, 이듬해 3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소양(昭襄)이다.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박거소(朴去疎)의 아들이고, 모친은 청송심씨로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며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스스로 스승을 찾아 공부하였고, 특히 무예에 뛰어났다.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에 들어갔다가 부호군(副護軍)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고, 1460년(세조 6) 7월 무과에 장원하여 훈련원부사(訓鍊院副使)가 되었다.
이어 훈련원지사(訓鍊院知事)‧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역임하고 곧 지병조사(知兵曹事)가 되었다.
1463년 병조참의를 거쳐 1466년에 병조참판이 되어 오위(五衛)의 부총관(副摠官)을 겸하였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휘하의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서 황해도의 관군을 이끌고 문천(文川)으로 들어가 정토에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9월 평안중도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호조판서에 임명되고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1468년 10월 남이(南怡)의 옥사(獄事)에 공을 세워 정난익대공신(靖難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재임되어 서정(西征)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7월 다시 평양군으로 봉해지고 10월 전라도 포도주장(捕盜主將)이 되어 당시 창궐하던 도둑떼의 소탕에 공을 세웠다.
1471년 3월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4월 영안북도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1476년 3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윤2월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들어와서 도총관이 되었다.
1477년 10월 문신들이 그를 ‘불해문묵(不解文墨)’이라고 반대하는데도 이조판서에 발탁되었으며, 이듬해 3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소양(昭襄)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명 : "중선(仲善)"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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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0-06-17 | 성종실록 132권, 1481년 8월 27일 기사를 참고하여 시호를 소양(昭襄)으로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