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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세겸(魚世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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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익(子益)
호(號)서천(西川)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430(세종 12)
졸년1500(연산군 6)
시대조선전기
본관함종(咸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어효첨(魚孝瞻)
외조부박은(朴訔)
저서『진법(陣法)』
저서『서천집』
공신호익대공신(翊戴功臣)

[상세내용]

어세겸(魚世謙)
1430년(세종 12)∼1500년(연산군 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익(子益), 호는 서천(西川).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의 아들이며, 우참찬 어세공(魚世恭)의 형, 좌의정 박은(朴訔)의 외손이다.

1451년(문종 1)에 생원이 되고, 1456년(세조 2)에 동생 어세공과 동방(同榜)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승문원정자봉상시녹사(奉常寺錄事)를 거쳐 1459년에 천추사(千秋使) 이극배(李克培)의 수행관인 이문학관(吏文學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문명을 드러내 예문관대교봉상시직장성균관주부예문관봉교 등 요직을 거쳐 1461년 이조좌랑, 1464년 이조정랑에 임용되었다.

1466년에 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의 천거로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예문관직제학을 겸하였고 이듬해 우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이르렀다.

1469년(예종 1)에는 강순(康純)남이(南怡)의 역모에 관한 옥사 이후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함종군(咸從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평안도관찰사로 외보되고, 성종의 즉위 후 경직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고 1471년(성종 2) 예조참판에 올랐다.

1474년 겸오위도총부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내고 1479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시에 아우 어세공병조판서로 재임중이어서 상피법(相避法)에 저촉되는 까닭에 한성부좌윤으로 옮겼다.

같은해 말에 건주위(建州衛) 정벌 승전에 관한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외교적인 성공을 거두고 귀국할 때 『오륜서(五倫書)』『국자감통지(國子監通志)』 등 귀중한 서책을 들여왔다.

귀국 후 전라도관찰사공조판서를 거치던 중 대간의 탄핵을 받아 일시 이조참판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이어 1482년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한성부판윤호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488년말에는 홍문관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좌참찬우찬성좌찬성을 거쳐 1495년(연산군 1)에 우의정, 이듬해에 좌의정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 때에는 사초(史草)문제로 탄핵을 받아 좌의정을 물러나면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그는 학식이 뛰어날 뿐 아니라 소절(小節)에 얽매이지 않아 형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출퇴근시간에 구애되지 않아서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 불리었으나, 이치(吏治)를 능률적으로 하여 결송(決訟)이 지체되지 않았다 한다. 문무를 겸비하여 내외치(內外治)에 많은 업적이 있으며, 특히 성종말에는 권근(權近)윤회(尹淮)변계량(卞季良)최항(崔恒)의 뒤를 이어 문형(文衡)을 담당하였다.

1483년 서거정(徐居正)노사신(盧思愼)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1490년 임원준(任元濬) 등과 함께 「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 등의 악사(樂詞)를 개찬(改撰)하였다. 같은해 가을에는 『주례(周禮)』를 개주(改註)하여 왕에게 올렸고, 1492년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전해온 여러 진서(陣書)의 이동(異同)을 참작하여 『진법(陣法)』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서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稗官雜記

[집필자]

이근수(李根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