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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광(金國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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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관경(觀卿)
호(號)서석(瑞石)
시호(諡號)정정(丁靖)
생년1415(태종 15)
졸년1480(성종 11)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철산(金鐵山)
공신호원종공신(原從功臣)
공신호적개공신(敵愾功臣)
공신호좌리공신(佐理功臣)

[상세내용]

김국광(金國光)
1415년(태종 15)∼1480년(성종 11). 조선시대의 문신‧공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사헌부감찰 김철산(金鐵山)의 아들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박사에 이르고, 1445년에는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이어 황해도도사성균관주부사헌부감찰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하였다.

1448년 4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이사임(李思任)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세조 1) 12월에는 교리로서 세조의 즉위를 도왔다 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으며, 당시 할머니의 상을 입고 있었으나 이듬해 복을 벗고 사헌부지평으로 임명되었다.

1458년 4월 최옥산(崔玉山)의 살부사건(殺父事件)이 일어나자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이것이 무고임을 밝혀내는 데 공을 세워, 세조의 신임을 얻게 되어 사헌부장령에 임명되고, 이어 성균사예(成均司藝)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역임하였다.

1460년 사섬시윤(司贍寺尹)에 임명되고 이어서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새로운 형전(刑典) 편찬을 주도했으며, 그해 10월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세조는 그의 박식한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직접 ‘사지제일(事知第一)’의 4자를 써서 하사하고, 당시 승지들이 모두 탄핵을 받자 가도승지(假都承旨)로 임명하여 왕명출납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1464년 10월 호조판서를 거쳐 이듬해에는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1466년 4월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7년 4월 우참찬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정부우찬성 겸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책훈되고 광산군(光山君)에 훈봉되는 동시에 좌찬성 겸 세자시강원 이사(貳師)병조판서오위도총부도총관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에 올랐으며, 이어 행해진 건주위(建州衛)정벌에도 공을 세워 군공(軍功) 3등에 책훈되었다.

1469년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맡았으나, 그해 10월에는 겸병조판서에서 해임되고 좌찬성으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이듬해 5월에는 충청도전라도문폐사(問弊使)로 내려가 여러가지 폐정 시정에 노력했으며, 8월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4월 좌의정으로 옮기고 5월에는 사은사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1등에 책훈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8월 그의 아우 김정광(金廷光)과 사위 이한(李垾)의 부정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다만 원상과 영경연사(領經筵事)만을 겸했다.

그뒤 사헌부사간원 등 대간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치면서도 1476년 5월 원상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원상으로서 국방‧외교‧법전편찬 등의 국정자문에 응하고 경연관으로서 국왕보도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1477년 10월 영중추부사를 거쳐 이듬해 6월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심한 반발로 사직하였다.

일찍이 세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경국대전』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新增東國輿地勝覽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