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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경(金之慶)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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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유후(裕後)
시호(諡號)경질(景質)
생년1419(세종 1)
졸년1485(성종 16)
시대조선전기
본관선산(善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지(金地)

[상세내용]

김지경(金之慶)
1419년(세종 1)∼1485년(성종 1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유후(裕後).

부친은 증호조판서 김지(金地)이다.

처음에 교서관교감에 제수되었고, 1440년 집현전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저작랑(著作郞)으로 승진하고,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봉교로 승진하였다.

그뒤 한성참군(漢城參軍)감찰사간원정언이조정랑의 요직을 거쳐, 장령에 올랐다. 거듭 상소하여 환관의 봉군(封君)을 혁파하였고, 이어서 검상(檢詳)을 거쳐, 단종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이르렀다. 세조집현전직제학이 되었는데, 그때 세조세자시강원우보덕에 임명하자 노부모의 봉양을 구실로 외직을 요청, 성주목사가 되었다.

1465년(세조 11)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교육을 주관하였고, 이어서 대사간으로서 간쟁(諫諍)활동을 폈는데, 특히 대사헌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서얼출신 유자광(柳子光)병조정랑 임명을 반대하였다.

그뒤 첨지중추부사강원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러나 예종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성종이 즉위하자 예문관부제학에 발탁되었다. 그때 불교서적 무역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1471년 대사헌이 되어 당시 좌의정의 탐학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리고 오백창(吳伯昌)의 봉군을 반대하고, 화공 최경(崔涇)의 승진을 반대하여 서경(署經)을 거부하였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감초(甘草)를 비롯한 약초재배의 관리에 힘썼고, 세곡운송문제에도 각별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1474년 지중추부사로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임금의 간곡한 권유로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수령의 탐학을 처벌하고, 성책을 보수하는 데 힘쓰는 등 3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뒤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1484년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이듬해 신병으로 사직하였는데, 성종의 특은으로 한직으로 돌려 호군에 제수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절개가 있어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6-11성종실록 181권, 1485년 7월 8일자 기사를 참고하여 시호 경질(敬質)을 경질(景質)로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