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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극관(趙克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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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453(단종 1)
시대조선전기
본관양주(楊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계생(趙啓生)

[상세내용]

조극관(趙克寬)
미상∼1453년(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조계생(趙啓生)의 아들이다.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에 등용되고, 1418년 정자(正字)에 승진하여 서연(書筵)에 나가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보필하던 중 이해 세자의 난행(亂行)을 막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그뒤 1420년(세종 2) 다시 우정언이 되고 지평을 거쳐 1426년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1427년 진하사(進賀使)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사헌부장령을 거쳐 1437년 지형조사(知刑曹事)가 되었고, 1441년 형조참의를 거쳐 우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공조참판을 지내고 1443년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46년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그해 8월 황해도도체찰사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아서 전라도 용안현(龍安縣)에 부처되었다.

1449년 다시 예조참판에 기용되었고, 이해 9월 요동지휘사(遼東指揮使) 왕무귀(王武貴)명제(明帝)의 조칙을 가지고 왔을 때 왕이 병으로 마중을 나가지 못하자, 왕을 대신해서 칙사를 맞이하였다. 그해 10월 형조판서에 올랐고, 12월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때 마침 침입해 온 야인들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고, 1451년(문종 1) 그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을 때 함경도 일대에 축성을 하여야만 국가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상계하여 성곽을 보수 또는 신축하고, 군사의 훈련제도를 강화하는 등 국방경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해 7월 형조판서대사헌을 거쳐 곧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얼마 뒤 우찬성이 되었다.

1453년 이조판서가 되었지만,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 김종서(金宗瑞)의 일파로 몰려 피살되었다. 영조 때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