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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승(曺寅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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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충헌(忠憲)
생년1827(순조 27)
졸년1896(건양 1)
시대조선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경섭(曺暻燮)

[상세내용]

조인승(曺寅承)
1827년(순조 27)∼1896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조경섭(曺暻燮)의 아들이다.

1867년(고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81년에는 응교로서 옥당(玉堂)에서 연차(聯箚)하여 척사의 소를 올린 이만손(李晩孫)홍시중(洪時中) 등의 처벌을 청하였다. 이해 동지사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3년 집의가 되고 이듬해는 식년시의 시관(試官)으로 임명되었다. 이해 승정원동부승지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일파의 처단을 청하는 계(啓)를 올렸다.

1888년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1890년 호군으로서 대호군 이승오(李承五) 등과 함께 과거의 시체문제(試體問題)를 거론하였다. 같은해 김춘희(金春熙)와 교체되고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92년에는 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894년 내무협판이 되었다.

이때 일본은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군대를 파견하고, 조선의 내정을 간섭함으로써 조선을 지배하려 하였다. 그래서 6월 1일 오토리(大鳥圭介)공사는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제시하며, 개혁안조사위원으로 국왕이 신임하는 중신을 임명하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6월 5일 내부독판 신정희(申正熙), 협판 김종한(金宗漢) 등과 함께 3인의 내정개혁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6월 8일 남산 노인정(老人亭)에서 일본측과 회담하였다.

일본측은 5조 27항의 개혁안을 제시하며 수락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측 위원들은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내정개혁을 할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그 대신 조선정부가 독자적인 개혁을 실시하고자 6월 11일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15인의 시원임대신을 당상으로 임명할 때 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뒤 공무아문의 협판을 지내고 1895년 중추원의관으로서 춘천부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해 명성황후(明成皇后)시해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자, 춘천이항로(李恒老) 문인 이소응(李昭應)의 의병부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서법(書法)이 뛰어났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日案
梅泉野錄
韓國史講座 Ⅴ―近代篇―(李光麟, 一潮閣, 1981)

[집필자]

하원호(河元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