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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손(李晩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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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가술(家述)
호(號)돈와(遯窩)
생년1811(순조 11)
졸년1891(고종 28)
시대조선후기
본관진성(眞城)
활동분야학자 > 유생
출신지경상북도 예안

[상세내용]

이만손(李晩孫)
1811년(순조 11)∼1891년(고종 28). 조선 후기의 유학자.

1881년(고종 18)의 만인소(萬人疏)의 소두(疏頭)였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가술(家述), 호는 돈와(遯窩). 경상북도 예안 출신. 이황(李滉)의 후손이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조선책략(朝鮮策略)』이 국왕에게 가납(嘉納)되고, 대신들의 동조에 의하여 개혁정책의 추진 및 외국과의 교섭이 빈번해지자 이에 자극된 조야(朝野)의 비판과 반대의 소리가 고조되어갔다.

이때 이만손『조선책략』을 읽고 중국일본미국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러시아세력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황준헌이 중국인이지만 오히려 일본의 세객(說客)인 것으로 규정하는 내용의 소를 올렸다.

그의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전참판 강진규(姜晉奎)이만운(李晩運), 전승지 이만유(李晩由)상주안동 지방 유생들이 연서하여 1881년 2월 고종에게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인데, 그 이후 전개된 전국적인 유생들의 반대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당시 조야의 주목대상이 된 이 상소문을 통하여 김홍집을 탄핵하였으나, 실은 정부에 대하여 공격하였으므로 관리들의 경계를 받았고, 민문척족(閔門戚族)의 중심인물인 민태호(閔台鎬)에게 주의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3월 재차 상소를 기도하자 조정비방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전라도 강진신지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온건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민씨정권에 대한 위정척사운동이 성숙되고, 민씨정권의 실정이 누적되어 임오군란이 일어나 척사를 표방하는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풀려나왔다.

만인소는 조선 후기 위정척사사상에 근거를 둔 민족자존의식을 역설하고 있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韓國哲學史(劉明鍾, 韓明文化社, 1969)
韓末의 民族思想(洪淳昶, 探求堂, 1975)
韓國史講座―近代篇―(李光麟, 一潮閣, 1982)

[집필자]

홍순창(洪淳昶)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