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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창(趙然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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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문보(文甫)
생년1810(순조 10)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민화(趙民和)

[상세내용]

조연창(趙然昌)
1810년(순조 10)∼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문보(文甫). 조민화(趙民和)의 아들이다.

1835년(헌종 1)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40년 한림소시(翰林召試)에 심경택(沈敬澤) 등과 함께 선발되었다.

1847년 전라좌도암행어사 이교영(李敎英)에 의하여 전무장현감 때의 실정(失政)으로 치죄되었다가, 이듬해 삼조보감(三朝寶鑑)을 왕이 친히 종묘에 봉서(奉書)하였을 때 교리로서 참여, 가자(加資)되었다.

1851년(철종 2) 암행어사 이승익(李承益)의 서계에 따라 순천부사로서의 치적이 인정되어 포상, 승서(陞敍)되었고 이듬해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뒤 강화부유수개성부유수를 거쳐 1859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해 정부에서 이이(李珥)성혼(成渾) 등 선현의 도덕 학문을 받들어 조가(朝家)가 성현을 숭상하는 뜻을 보이고자 하여, 그들의 사손(祀孫) 중 빈한하여 향화(香火)를 이을 수 없는 자를 각 수령이 이송하도록 하였을 때 이 문제를 담당하는 정경(正卿)으로 대사간 한정교(韓正敎) 등과 함께 발탁되었다.

그뒤 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 등의 외직을 역임한 뒤 한성부판윤대사헌을 지내고, 1863년 예조판서로 임명되어 상책보시(上冊寶時)에는 제조로 참여하였다.

1863년 동지정사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즉위 후에도 중임을 맡아 1864년(고종 1)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1866년에는 상호도감(上號都監)에서 익종대왕옥책문(翼宗大王玉冊文)의 금보전문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을 맡았다. 이해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이어 판의금부사예문관제학 등을 여러 차례 중임하였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하원호(河元鎬)
대표명조연창(趙然昌)
연창(然昌)
성명조연창(趙然昌)

명 : "연창(然昌)"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勅使日記v16後奉傳御帖告以奉命特來之意則兩勅答以爲慰問若是勤摯千萬感謝云而本府別問安使及問安中使賫來御帖奉傳于臣然昌故差使員重林察訪崔道玄處賫奉上送于承政院爲白乎旀夕飯俸無弊支過明日軍令以卯正書出而上勅所製碧蹄舘詩七
勅使日記v16御帖謹以聖敎勞問則兩勅雙手擎覽還爲傳授曰偏蒙盛念無事到此不勝感謝云云是白乎旀御帖則別問安使還賫傳於臣然昌乙仍于謹爲陪奉將於到灣後定差員呈納于承政院計料是白遣上勅生陽舘所製五絶二首亦請揭板故下送該府使之刻揭
勅使日記v16紅紬一段扇子一把刀子一柄荷包一對帽子十立賞給副勅以藍紬一端扇一把刀一柄荷包一對帽子十立賞給而御帖則臣然昌依例祗受亦爲陪奉到灣後定差員呈納于承政院計料是白乎旀上去時上勅大定江淸川江所賦七律二首揭板於安興舘後
勅使日記v16爲入見奉傳御帖後謹以聖敎措辭勞問則兩勅擎覽還授曰特蒙盛念無事到此而荐賜慰存不勝感激云云是白乎旀御帖臣然昌還爲祗受並與前站奉還御帖一體定差員陪奉呈納于承政院計料是白遣上勅上去時良策舘所製五律一首印本依例入給
上尊號都監儀軌v1 謹稽謄錄 則議定尊號上箋 皆於議號日擧行矣 今亦依此擧行 而箋文令藝文館承文院擧行何如上曰 依爲之然昌曰 謹稽謄錄 則大殿中宮殿議定尊號時 議號箋文 只上於大殿矣 今亦依此擧行何如上曰 依爲之然昌曰 今
上尊號都監儀軌v1書趙然昌曰大殿中宮殿上尊號議定時 時原任大臣館閣堂上九卿三司長官六曹參判 令政院命招何如上曰 依爲之然昌曰 謹稽謄錄 則議定尊號上箋 皆於議號日擧行矣 今亦依此擧行 而箋文令藝文館承文院擧行何如上曰 依爲
上尊號都監儀軌v1依爲之然昌曰 謹稽謄錄 則大殿中宮殿議定尊號時 議號箋文 只上於大殿矣 今亦依此擧行何如上曰 依爲之然昌曰 今此定尊號上箋時 以臨殿親受磨鍊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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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