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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수(李存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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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로(性老)
호(號)연유(蓮游)
시호(諡號)문익(文翼)
생년1772(영조 48)
졸년1829(순조 29)
시대조선후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문원(李文源)
조부이천보(李天輔)
외조부심수(沈鏽)

[상세내용]

이존수(李存秀)
1772년(영조 48)∼1829년(순조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로(性老), 호는 금석(金石) 또는 연유(蓮游). 이정귀(李廷龜)의 후손으로,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의 손자이고, 판서 이문원(李文源)의 아들이며, 모친은 이조판서 심수(沈鏽)의 딸이다.

1794년(정조 1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정자교서관정자를 겸하였다.

1800년 겸시강원설서겸실록기사관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1802년(순조 2) 의정부검상규장각직각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황해감사 때에 공심(孔甚)연백(延白) 두 읍의 민은(民隱)을 보살폈다.

그뒤 1808년 이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1810년 규장각직제학전라감사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경기감사 때에 적부(籍簿)의 문란을 바로잡고, 1814년 경상도관찰사 때에 영남의 대흉년을 구제하여 크게 치적을 세웠으므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1817년 선혜청 제조 때에 선혜청 출납업무의 폐단을 근절하였다.

이듬해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추천으로 자헌대부에 뽑혀 의정부우참찬형조판서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1819년 대사헌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821년 예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1823년 예문관제학판의금부사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26년 함경감사 때에 조적(糶糴)의 고르지 못함을 바로잡는 오조변통책(五條變通策)을 강구하였다.

이듬해 우의정이 되어 수령 고과의 법을 엄하게 하고 족징(族徵)의 폐단을 근절할 것을 주장하였다.

1829년 좌의정이 되어 포삼(包蔘)을 잠월(潛越)하는 폐단을 막고, 망화정(望華亭) 거민(居民)이 관속을 빙자하여 도고(都賈)하므로 이를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좌의정 재직중에 죽었다.

명문출신으로 벼슬길이 순탄하였으며, 연석(筵席)에서 논주할 때는 직언으로 하며 아첨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편서인 『광보자경편(廣補自警編)』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國朝榜目
經山集

[집필자]

김동철(金東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