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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교(金履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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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세(公世)
호(號)죽리(竹里)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764(영조 40)
졸년1832(순조 32)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방행(金方行)
저서『죽리집』

[상세내용]

김이교(金履喬)
1764년(영조 40)∼1832년(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

관찰사 김방행(金方行)의 아들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수찬초계문신(抄啓文臣)북평사(北評事)를 거쳐, 1800년 겸문학(兼文學)이 되었다. 같은해 6월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노론 벽파(僻派)가 정권을 잡고 시파(時派)를 탄압하였다.

이때 시파로서 벽파에 의해 함경북도 명천에 유배당하고 동생 김이재(金履載)전라남도 고금도에 안치되었다.

1806년(순조 6) 부사과의 직첩을 환수받고 동부승지이조참의강원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810년 10월 10일 일본 통신사에 임명되었으나, 같은해 12월 호조판서 심상규(沈象圭)를 탄핵하다가 일단 나포되고 통신사도 교체하기로 되었다.

그러나 같은달 16일에는 다시 통신사로 재임명되었다.

1811년 2월 12일 통신사의 사명을 띠고 출발하여 5월 22일 부사(副使) 이면구(李勉求)와 함께 대마도부중(對馬島府中)의 객관(客館)에서 동무상사(東武上使) 미나모토[源忠岡]와 부사 후지야스[藤安薰]에게 국서전명(國書傳命)을 거행하고 공사예단(公私禮單)을 증급(贈給)하였다.

사명을 다하고 같은해 7월 3일 대마도를 떠나 부산에 도착하였고, 7월 26일에 복명하였다.

이듬해에도 대마도에 건너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그뒤 성균관대사성사헌부대사헌도승지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이조판서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31년 우의정에 올랐는데, 이때 영의정좌의정이 모두 공석중이었으므로 한때 국정을 도맡아 수행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순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죽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집필자]

정중환(丁仲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