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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대(曺允大)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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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원(士元)
호(號)동포(東浦)
생년1748(영조 24)
졸년1813(순조 13)
시대조선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명준(曺命峻)
조부조하정(曺夏挺)
생조부조하망(曺夏望)

[상세내용]

조윤대(曺允大)
1748년(영조 24)∼1813년(순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포(東浦).

대사간 조하정(曺夏挺)의 손자로, 조명준(曺命峻)의 아들이다.

1779년(정조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을 지낸 뒤 초계문신(抄啓文臣: 당하관 중에서 문학에 뛰어나 시험관으로 뽑힌 문신)으로 뽑혔다.

1784년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이조전랑직에 있을 때 이조판서 이명식(李命植)송시열(宋時烈)의 후손을 능관(陵官)으로 추천한 일이 있었는데, 홍국영(洪國榮)과 결탁한 역적 송덕상(宋德相)의 친척이라는 점을 지적하여 그 부당성을 끝까지 주장함으로써 마침내 파직시켰고, 그뒤 소론의 명장으로 활약하였다.

1786년 홍문관응교 재직시에는 대사헌 윤승렬(尹承烈), 대사간 박천행(朴天行)과 함께 앞서 세도를 부리다가 이미 제거된 홍국영 사건에 관련, 당시의 관계자 후속처벌문제를 놓고 삼사복합상소(三司伏閤上疏)를 올려 일대 옥사를 일으키는 한편, 자신도 한때 파직되었다.

그뒤 이조참의대사성경원부사대사간을 역임하고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대사간 유강(柳焵) 등과 같이 채제공(蔡濟恭)을 탄핵하는 삼사연계(三司聯啓)를 올린 일도 있었다.

1794년 이후 강화부유수충청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을 지낸 뒤 1801년(순조 1)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실록청당상의 임무를 맡아 『정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같은해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 신유사옥에서 처형된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에 대한 전후의 자세한 사정을 전하고 돌아왔다.

1804년 병조판서에 이어 대사간형조판서예문관제학이조판서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09년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당시 함흥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약 1,800호의 민가가 재난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명천경성회령부령 등지에서는 14일간에 걸친 대지진이 일어나 가옥과 성채가 무너지고 사람과 가축이 압사하는 커다란 천재지변을 겪기도 하였다.

1811년 홍문관제학판의금부사에 이어 이조판서 재직중 다시 동지사의 임무를 띠고 청나라에 다녀온 다음 한성판윤을 거쳐 1813년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저술로는 『최열사전(崔烈士傳)』 등이 있고, 서예에도 능하여 「강릉오봉서원경적비(江陵五峰書院經蹟碑)」 등의 작품이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昌寧曺氏昌寧府院君世譜
韓國故事大典(金舞東, 回想社, 1965)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