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정(金鍾正)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885C815B1722X0 |
자(字) | 백강(伯剛) |
호(號) | 운계(雲溪) |
시호(諡號) | 청헌(淸獻) |
생년 | 1722(경종 2) |
졸년 | 1787(정조 1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청풍(淸風)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치후(金致垕) |
외조부 | 이규수(李奎壽) |
저서 | 『운계집』 |
저서 | 『사례집요(四禮輯要)』 |
저서 | 『문헌집략(文獻輯略)』 |
저서 | 『시차(詩箚)』 |
저서 | 『서차(書箚)』 |
저서 | 『예차(禮箚)』 |
저서 | 『중용기의(中庸記疑)』 |
저서 | 『중용집설(中庸集說)』 |
저서 | 『가범(家範)』 |
저서 | 『낙민장보(洛閩狀譜)』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종정(金鍾正)
1722년(경종 2)∼1787년(정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강(伯剛), 호는 운계(雲溪).
부친은 대사간 김치후(金致垕)이며, 모친은 완산이씨로 군수 이규수(李奎壽)의 딸이다.
1741년(영조 17) 사마시에 합격, 정릉참봉에 임명된 뒤 경산현령을 지냈다.
1757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부교리‧부수찬‧교리를 지내고,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의성현령이 되었으나 이듬해 곧 사서(司書)로 옮겼으며, 어사(御史)로 나가 많은 민폐를 바로잡았다.
이어서 좌부승지‧예조참판‧도승지를 거쳐 의주부윤이 되고 이듬해 청천군(淸川君)에 봉해졌다.
그뒤에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대사헌‧경기감사‧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강원감사‧성균관대사성‧형조판서‧이조판서‧예조판서 등 많은 요직을 역임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뒤 홍국영(洪國榮)에게 몰려났다가 홍국영이 실각하자 1782년(정조 6) 청천군의 군호(君號)가 회복되고 이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한성판윤‧판의금부사‧형조판서‧좌참찬 등을 지냈다.
증조(曾祖) 김간(金幹)의 가학을 이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운계집』‧『사례집요(四禮輯要)』‧『문헌집략(文獻輯略)』‧『시차(詩箚)』‧『서차(書箚)』‧『예차(禮箚)』‧『중용기의(中庸記疑)』‧『중용집설(中庸集說)』 1권, 『가범(家範)』‧『낙민장보(洛閩狀譜)』 등이 있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부친은 대사간 김치후(金致垕)이며, 모친은 완산이씨로 군수 이규수(李奎壽)의 딸이다.
1741년(영조 17) 사마시에 합격, 정릉참봉에 임명된 뒤 경산현령을 지냈다.
1757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부교리‧부수찬‧교리를 지내고,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의성현령이 되었으나 이듬해 곧 사서(司書)로 옮겼으며, 어사(御史)로 나가 많은 민폐를 바로잡았다.
이어서 좌부승지‧예조참판‧도승지를 거쳐 의주부윤이 되고 이듬해 청천군(淸川君)에 봉해졌다.
그뒤에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대사헌‧경기감사‧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강원감사‧성균관대사성‧형조판서‧이조판서‧예조판서 등 많은 요직을 역임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뒤 홍국영(洪國榮)에게 몰려났다가 홍국영이 실각하자 1782년(정조 6) 청천군의 군호(君號)가 회복되고 이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한성판윤‧판의금부사‧형조판서‧좌참찬 등을 지냈다.
증조(曾祖) 김간(金幹)의 가학을 이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운계집』‧『사례집요(四禮輯要)』‧『문헌집략(文獻輯略)』‧『시차(詩箚)』‧『서차(書箚)』‧『예차(禮箚)』‧『중용기의(中庸記疑)』‧『중용집설(中庸集說)』 1권, 『가범(家範)』‧『낙민장보(洛閩狀譜)』 등이 있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雲溪集
雲石遺稿
正祖實錄
雲溪集
雲石遺稿
[집필자]
조준하(趙駿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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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