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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만(趙正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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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정이(定而)
호(號)오재(寤齋)
시호(諡號)효정(孝貞)
생년1656(효종 7)
졸년1739(영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임천(林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경망(趙景望)
진주유씨(晉州柳氏)
외조부유식(柳寔)
저서『오재집』

[상세내용]

조정만(趙正萬)
1656년(효종 7)∼1739년(영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정이(定而), 호는 오재(寤齋).

부친은 합천군수 조경망(趙景望)이며, 모친은 진주유씨(晉州柳氏)유식(柳寔)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숙종 7) 진사시에 장원하여 성균관유생이 되고, 1694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이어 공조‧호조의 낭관, 제용감군자감판관, 장악원정 등을 지냈다. 지방으로 나가서는 강서현령평양서윤광산현감안악군수, 청송성천의 부사, 나주‧능주‧청주양주상주목사를 지냈다.

1722년(경종 2)신임사화가 일어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었고, 이어 영변으로 이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풀려나 수원부사충청도관찰사호조참의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경연에서 ‘알인욕(遏人慾)‧존천리(存天理)’의 설을 반복하여 아뢰니, 임금이 경청하고 호피(虎皮)를 특사하였다.

1735년 지돈녕부사한성부판윤 및 공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있었고, 경(經)‧사(史)‧백가서(百家書)에 두루 통하였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이희조(李喜朝) 등과 친교가 깊었다.

저서로는 『오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人物考
寤齋集

[집필자]

조준하(趙駿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