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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중(閔鼎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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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대수(大受)
호(號)노봉(老峰)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628(인조 6)
졸년1692(숙종 18)
시대조선중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광훈(閔光勳)
저서『노봉집』
저서『노봉연중설화(老峰筵中說話)』
저서『임진유문(壬辰遺聞)』

[상세내용]

민정중(閔鼎重)
1628년(인조 6)∼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峰).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49년(효종 즉위)에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으로 벼슬에 나아가, 예조좌랑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직언(直言)으로 뛰어나 사간원정언사간에 제수되고,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동래부사를 지냈으며, 전라도충청도경상도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소(疏)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논죄되어 죽음을 당한 강빈(姜賓)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왕도 그의 충성을 알아주기 시작하였다.

이어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가 죽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복을 벗은 뒤 사간원대사간으로 나아갔다.

그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이조참판함경도관찰사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670년(현종 11) 이조호조공조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삼사에 재직할 때는 청의(淸議)를 힘써 잡았고, 대사성에 있을 때는 성균관의 증수(增修)와 강과(講課)에 마음을 다하여 조사(造士)의 효과가 매우 많았다.

또한, 함경도관찰사로 나갔을 때는 그곳의 유풍(儒風)을 크게 일으켰다.

1675년(숙종 1)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허적(許積)윤휴(尹鑴) 등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고, 1679년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에 올라 4년을 지냈다.

이때 호포(戶布) 등 여러가지 일을 실행하려 하였으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반대에 부딪혔다.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로 물러앉아 국왕을 보필하였다.

그러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실각하자 관작이 회복되어, 양주에 옮겨 장례를 치르고, 뒤에 여주로 옮겨졌다. 현종의 묘정(廟庭)과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 연곡서원(淵谷書院), 함흥 운전서원(雲田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峰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노봉집』『노봉연중설화(老峰筵中說話)』『임진유문(壬辰遺聞)』 등이 전하며, 글씨로는 「우상이완비(右相李浣碑)」‧「개성부유수민심언표(開城副留守閔審言表)」‧「개심사대웅전편액(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國朝人物考
萬姓大同譜
黨議通略

[이미지]

[집필자]

한영국(韓榮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