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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영(李顯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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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경(重卿)
호(號)쌍산(雙山)
시호(諡號)충정(忠貞)
생년1573(선조 6)
졸년1642(인조 20)
시대조선중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대수(李大秀)
외조부홍질(洪礩)

[상세내용]

이현영(李顯英)
1573년(선조 6)∼1642년(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곡(蒼谷)쌍산(雙山).

부친은 군수 이대수(李大秀)이며, 모친은 장사랑 홍질(洪礩)의 딸이다.

1595년(선조 28)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평안도평사지평 등을 거쳐 수찬교리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헌납이 되었다가 교동현감으로 나갔는데, 그때 인척인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그곳에 유배중인 임해군(臨海君: 광해군의 형)의 암살을 종용받았으나 이에 불응하여 미움을 받아 투옥되었다.

이듬해 다시 부수찬으로 기용되어 그뒤 서흥부사를 거쳐, 1618년에 예빈시정이 되었다가 봉상시정필선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명나라에 다녀왔다.

1621년에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대북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은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에 등용, 1624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고, 1625년 예조형조참판대사헌을 지내고, 1626년 이조참판, 1627년 동지중추부사, 1629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부제학도승지참찬관 등을 역임하고, 1632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행호군으로 산릉도감(山陵都監)을 겸하였다. 이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대사헌, 예조형조판서를 지내고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후금의 군사와 싸웠다.

이듬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지난해 난 때에 왕을 호종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사퇴하였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42년에 청나라 용골대(龍骨大)소현세자(昭顯世子)를 볼모로 삼아 심양(瀋陽)에 잡아놓고 조선 사신의 입국을 요구하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심양에 가서 한달 동안 감금되었다가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