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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눌(李安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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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민(子敏)
호(號)동악(東岳)
시호(諡號)문혜(文惠)
생년1571(선조 4)
졸년1637(인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덕수(德水)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필(李泌)
생부이형(李泂)
증조부이행(李荇)
저서『동악집』

[상세내용]

이안눌(李安訥)
1571년(선조 4)∼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이행(李荇)의 증손으로 진사 이형(李泂)의 아들이며, 모친은 경주이씨이다.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이필(李泌)에게 입양되었다.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동년배인 권필(權鞸)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교우를 맺었는데, 이러한 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하였다.

29세 때 다시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이조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하였다.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관서에 나갔으며, 다시 예조에 들어왔다가 단천군수가 되었다.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곧 호조참의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되었다. 동부승지에서 좌부승지가 된 뒤 사직하고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비방하는 말들이 생겨 사직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되었다.

1631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예조판서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도순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청렴근면한 관리를 뽑는 데 들게 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서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해(1636)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가 환도한 뒤에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특히 시작에 주력하여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두보(杜甫)의 시를 만번이나 읽었다고 하며, 시를 지을 때 일자일구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당시(唐詩)에 능하여 이태백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문가(聞歌)」가 특히 절창이라 일컬어졌고,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東萊四月十五日)」은 사실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난을 형상화시킨 장편시로서,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막으려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는 자신이 옮겨다닌 고장을 중심으로 묶여 있어서 그 지방의 민중생활사 및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으며, 특히 그의 생애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에 걸쳐 있으므로 국난에 피폐해진 당시의 상황을 추적하여 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로 사행가면서 지은 그의 시에서는 대명교섭사(對明交涉史)의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담양구산서원(龜山書院)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저서로는 『동악집』 26권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澤堂集
東岳集(驪江出版社 影印, 1985)

[집필자]

김진영(金鎭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