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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金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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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숙진(叔珍)
호(號)눌암(訥菴)
시호(諡號)효헌(孝獻)
생년1543(중종 38)
졸년1599(선조 32)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舊])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언침(金彦沈)

[상세내용]

김찬(金瓚)
1543년(중종 38)∼1599년(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舊]).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부친은 형조참의 김언침(金彦沈)이다.

1567년(명종 22)에 진사가 되고, 156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軍籍)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직제학‧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임금 일행이 개경에 이르자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영의정에서 파직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김공량(金公諒)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뒤에 정철(鄭澈)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또, 일본과 강화회담을 벌일 때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연이어 지냈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까지 승진하였다. 대사헌 때 가족을 멀리 피난시켰다고 탄핵을 받고 체직되는 등 소소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지만,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이었다.

임진왜란 뒤 전쟁의 수습과정에서 죽자, 선조는 조회를 정지하여 추모의 뜻을 표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이미지]

[집필자]

유병용(兪炳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