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승(成勝)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131C2B9FFFFD1456X0 |
호(號) | 적곡(赤谷) |
시호(諡號) | 충숙(忠肅) |
생년 | ?(미상) |
졸년 | 1456(세조 2)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창녕(昌寧)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묘소 |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 |
[상세내용]
성승(成勝)
미상∼1456년(세조 2).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적곡(赤谷).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이다. 무과에 급제, 1440년(세종 22)에 경상도병마절제사를 거쳐, 1446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1년(문종 1)에 정조사(正朝使)부사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1453년(단종 1)에 의주목사가 되고, 1455년에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이 되었다.
그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禪位)를 받자, 그는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통곡을 하면서 방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으면서 그의 아들인 삼문을 비롯하여,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김질(金礩) 등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들과 유응부(兪應孚)‧박쟁(朴崝) 등의 무신을 포섭하여 은밀히 추진하는 단종복위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세조가 그를 달래기 위하여 벼슬을 지중추원사로 높였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창덕궁에서 큰 잔치를 여는 그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동지중추원사인 유응부와 당상(堂上) 무신인 박쟁과 함께, 왕의 뒤에 운검(雲劒)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 세조가 잔치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고 명을 내렸으므로 그날의 거사는 중지되고, 뒷날 임금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는 행사인 관가(觀稼)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뒤로 미루어지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배반하여 세조에게 밀고하였다. 그 결과 아들 성삼문을 비롯한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잡혀가서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다.
이때 아들 성삼문‧성삼빙(成三聘)‧성삼고(成三顧)‧성삼성(成三省)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했으니 이로 인하여 그의 후사는 끊겼다.
그뒤 1784년(정조 8)에 판서 엄숙(嚴璹)의 상소에 의하여 신원되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오늘날 그에 대한 상세한 행장이나 전기 등이 없음은 당시 그의 혈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두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문명 높은 성삼문의 아버지였음을 생각할 때, 그는 문무겸비의 재상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묘는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데, 일설에는 노량진 사육신 묘역 안에 일찍이 ‘성씨의 묘(成氏之墓)’라고 쓴 작은 비석이 세워진 두개의 묘가 있어, 그 한기는 그의 묘이고 다른 한기는 성삼문의 묘라는 구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성삼문의 묘밖에 없다. 장릉(莊陵: 端宗의 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고,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1년(문종 1)에 정조사(正朝使)부사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1453년(단종 1)에 의주목사가 되고, 1455년에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이 되었다.
그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禪位)를 받자, 그는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통곡을 하면서 방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으면서 그의 아들인 삼문을 비롯하여,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김질(金礩) 등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들과 유응부(兪應孚)‧박쟁(朴崝) 등의 무신을 포섭하여 은밀히 추진하는 단종복위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세조가 그를 달래기 위하여 벼슬을 지중추원사로 높였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창덕궁에서 큰 잔치를 여는 그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동지중추원사인 유응부와 당상(堂上) 무신인 박쟁과 함께, 왕의 뒤에 운검(雲劒)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 세조가 잔치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고 명을 내렸으므로 그날의 거사는 중지되고, 뒷날 임금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는 행사인 관가(觀稼)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뒤로 미루어지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배반하여 세조에게 밀고하였다. 그 결과 아들 성삼문을 비롯한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잡혀가서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다.
이때 아들 성삼문‧성삼빙(成三聘)‧성삼고(成三顧)‧성삼성(成三省)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했으니 이로 인하여 그의 후사는 끊겼다.
그뒤 1784년(정조 8)에 판서 엄숙(嚴璹)의 상소에 의하여 신원되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오늘날 그에 대한 상세한 행장이나 전기 등이 없음은 당시 그의 혈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두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문명 높은 성삼문의 아버지였음을 생각할 때, 그는 문무겸비의 재상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묘는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데, 일설에는 노량진 사육신 묘역 안에 일찍이 ‘성씨의 묘(成氏之墓)’라고 쓴 작은 비석이 세워진 두개의 묘가 있어, 그 한기는 그의 묘이고 다른 한기는 성삼문의 묘라는 구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성삼문의 묘밖에 없다. 장릉(莊陵: 端宗의 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고,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莊陵誌
燃藜室記述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莊陵誌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명 : "승(勝)"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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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