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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담(洪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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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태허(太虛)
시호(諡號)정효(貞孝)
생년1509(중종 4)
졸년1576(선조 9)
시대조선전기
본관남양(南陽[土])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언광(洪彦光)

[상세내용]

홍담(洪曇)
1509년(중종 4)∼1576년(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土]). 자는 태허(太虛). 정랑 홍언광(洪彦光)의 아들이며,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의 조카이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저작(著作)설서(說書)정언을 거쳐, 1546년(명종 1) 예조이조정랑, 1547년 장령장악원첨정응교를 역임하였다.

1548년 사간, 사복시사재감정(正), 집의가 되고 이듬해 예빈시부정전한(典翰)을 거쳐, 1550년 직제학동부승지, 1553년 호남관찰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우윤, 형조참판을 지냈다.

1555년 한성부좌윤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부제학도승지대사간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560년 영남관찰사홍주목사, 형조공조참판, 1565년 함경도관찰사지중추부사 겸도총관, 1568년(선조 1) 병조판서, 동지경연성균관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예조판서, 1574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좌참찬영중추부사를 거쳐, 1576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한 뒤 지중추부사우참찬에 이르렀다. 응교로 있을 때 진복창(陳復昌)윤원형(尹元衡)의 권세에 빌붙어 사사로이 중상모략을 하자 이를 막았다.

훈구파(勳舊派)의 거두로서 김개(金鎧)와 함께 정철(鄭澈) 등의 사림파와 대립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