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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령(李龜齡){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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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미지(眉之)
생년1482(성종 13)
졸년1542(중종 37)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의(全義)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덕숭(李德崇)
조부이신효(李愼孝)
외조부홍순성(洪循性)

[상세내용]

이귀령(李龜齡)
1482년(성종 13)∼1542년(중종 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미지(眉之).

증조부는 이의흡(李宜洽)이며, 조부는 이신효(李愼孝)이고, 부친은 관찰사 이덕숭(李德崇)이다. 모친은 홍순성(洪循性)의 딸이고,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 경원수(慶源守) 이인손(李仁孫)의 딸과 무안박씨(務安朴氏) 호조판서(戶曹判書) 박호(朴壕)(주1)
가계
본인의 문과방목을 참고하여 증조부, 처부1‧2를 추가함.
의 딸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외삼촌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참봉이 되어 151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19년 예조좌랑이 된 뒤 1521년 헌납문학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지평으로 있을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유신들을 구출하려다 무고를 당한 안처겸(安處謙) 등의 죄를 엄정히 처리할 것을 강변하였다.

1523년에 문학을 거쳐 필선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이 되자 사헌부로부터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장계로 인하여 체차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1525년 보덕을 역임한 뒤 부응교를 거쳐 전라도어사로 파견되어 지방수령들의 근무태만과 부정을 조정에 보고하여 이들을 면직하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응교를 거쳐 1526년에는 전한이 되었다.

이듬해 예조참의동부승지를 거쳐 승지가 되었는데, 당시 강서시험(講書試驗)의 시관으로 부표(付標)를 누통(漏通)한 일로 대간들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왕의 옹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이해 대사간에 임명되자, 그는 지난날 지은 부표의 누통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것을 왕에게 아뢰어 체차시켜줄 것을 자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28년에는 관찰사가 되고, 이어 1530년에는 대사성의 물망에 올랐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오르지 못하였으며, 곧 좌부승지가 되었다.

1532년에 특명으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534년 한성부우윤이 되고 이듬해에는 유수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1537년 호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공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때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 실록이 소실되자 춘추관의 실록을 등서하여 재배치할 것을 청하여 이를 실현하게 하였다.

이어 1539년에는 빈객(賓客)이 되고, 이듬해 좌참찬이 되자 동반 정3품 이상, 서반 2품 이상 되는 중신들은 유일지사(遺逸之士)를 천거하게 하라는 왕명으로 생원 안백증(安伯增), 유학 성수침(成守琛)을 천거하였다. 곧 우참찬을 거쳐 병조판서가 된 뒤 1542년에 지돈녕부사로 죽었다.

척신으로 고관을 지냈으면서도 국사에 소홀하였다는 사가들의 평을 받았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권인혁(權仁赫)
대표명이귀령(李龜齡){1}
구령(龜齡)
성명이구령(李龜㱓), 이구령(李龜齡)
미지(眉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10-04본인의 문과방목을 참고하여 증조부, 처부1‧2를 추가함.[수정자: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