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석(金礪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5ECC11DB1445X0 |
자(字) | 은경(殷卿) |
시호(諡號) | 충목(忠穆) |
생년 | 1445(세종 27) |
졸년 | 1493(성종 24)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광산(光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수(金洙)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여석(金礪石)
1445년(세종 27)∼1493년(성종 2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은경(殷卿). 강화부사 김수(金洙)의 아들이다.
1465년(세조 11)에 진사, 그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 겸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으며, 뒤에 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 1) 재행겸비자(才行兼備者)를 선발할 때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뽑혔으며, 1472년 병조정랑이 된 뒤 의정부검상‧사인을 거쳐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479년 성균관의 사예(司藝)로서 원수(元帥)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建州衛)토벌에 참여하였으며, 1481년 사간원사간‧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우승지‧도승지와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조참의로 재직중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탄핵되어, 1487년 충청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판결사(判決事)를 겸한 뒤 경상도‧강원도의 관찰사, 호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91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예조참판을 거쳐 1493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관리가 되어서는 사람의 뜻을 살피기에 힘써 향응(響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사관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1465년(세조 11)에 진사, 그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 겸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으며, 뒤에 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 1) 재행겸비자(才行兼備者)를 선발할 때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뽑혔으며, 1472년 병조정랑이 된 뒤 의정부검상‧사인을 거쳐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479년 성균관의 사예(司藝)로서 원수(元帥)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建州衛)토벌에 참여하였으며, 1481년 사간원사간‧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우승지‧도승지와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조참의로 재직중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탄핵되어, 1487년 충청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판결사(判決事)를 겸한 뒤 경상도‧강원도의 관찰사, 호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91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예조참판을 거쳐 1493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관리가 되어서는 사람의 뜻을 살피기에 힘써 향응(響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사관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成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명 : "여석(礪石)"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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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