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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朴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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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대관(大觀)
호(號)하석(霞石)
시호(諡號)충숙(忠肅)
생년1596(선조 29)
졸년1632(인조 10)
시대조선중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동선(朴東善)

[상세내용]

박정(朴炡)
1596년(선조 29)∼1632년(인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석(霞石). 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의 아들이다.

1619년(광해군 11)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보임되었다가 아버지가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자, 사직하고 시골에 내려와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靖社) 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같은해 홍문관정자박사를 거쳐 다음해 사간응교장령집의검상 등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대사헌이 된 남이공(南以恭)부응교 유백증(柳伯曾), 교리 나만갑(羅萬甲) 등과 함께 광해군 때에 당파를 만들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함평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2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어 호패법을 강화하자고 주장하였고, 그뒤 대사간병조참지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대사간으로부터 붕당을 만들고 자기파를 천거하였다는 이유로 좌천되어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가 남원부사로 임명될 때에 새 수령을 영접하러 나온 아전이 그를 보고는 “젊은 사람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오똑하게 단정히 앉아 있어 그 마음속을 알 수 없다.”고 칭찬하였다. 이 당시 그는 관내의 도적을 색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금주군(錦州君)에 봉하여지고 1631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에 특진되었다가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소서파(小西派)의 핵심 인물로 비록 말은 과감하게 한다는 칭찬이 있으나, 급하고 곧은 뜻이 지나쳐 자기 의견만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이미지]

[집필자]

김철희(金喆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