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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임(朴承任)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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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보(重甫)
호(號)소고(嘯皐)
생년1517(중종 12)
졸년1586(선조 19)
시대조선전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형(朴珩)
예안김씨(禮安金氏)
외조부김만일(金萬鎰)
출신지경상북도 영주
저서『성리유선(性理類選)』
저서『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
저서『강목심법(綱目心法)』
저서『소고문집』

[상세내용]

박승임(朴承任)
1517년(중종 12)∼1586년(선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 경상북도 영주 출신. 박형(朴珩)의 아들이며, 모친은 예안김씨(禮安金氏)김만일(金萬鎰)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크게 촉망받았다.

1540년(중종 35) 24세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예문관승정원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정자(正字)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옥당(玉堂)에 있을 때는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대한 충언을 담은 1만여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정책결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어 수찬에 승진되고, 이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의 명망이 세상을 떨치자 당시 세도가인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으로 악명이 높았던 진복창(陳復昌)이 그를 농락할 목적으로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으며, 그뒤 소윤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고, 그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귀향, 복(服)을 벗은 뒤 현풍현감이 되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57년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윤원형의 세도가 더욱 심하여 벼슬에서 은퇴, 두문불출로 독서에 힘썼다. 그 이듬해 풍기군수로 다시 임명되어 치적을 쌓고, 임기가 만료되어 교감(校勘)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얼마 있다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고, 판교(判校)를 거쳐 1565년 병조참의에 승진되고, 그 이듬해 동부승지로 전직되었다가 얼마 뒤 진주목사로 나아갔다.

1569년(선조 2) 동지부사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1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좌승지에 임명되고, 1573년 도승지에 승진되었으며, 다음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이때 집경전(集慶殿)에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사람들이 함부로 문을 열어보는 등 예절을 지키지 않자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봉심(奉審)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또한 경주 일대의 묵는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관비를 충당하는 한편, 조세를 감면하고 부역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576년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강화부유수여주목사를 거쳐 1581년 춘천부사에 나아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83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언사(言事)에 연루, 왕의 뜻에 거슬려 창원부사로 좌천, 얼마 뒤 중앙에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풍모가 준걸하고 평소 말이 없이 과묵하였으며, 항상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하였다. 일찍이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서적을 읽었으며, 특히 『논어』와 주자서(朱子書)를 탐독,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해두었다가 스승인 이황에게 질문하여 실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시문에 능하여 한때 많은 시작활동이 있었으나, 중년 이후로는 사람을 부박(浮薄)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를 중지하고 심학(心學)에 주력하며 실천적 수행에 힘썼다.

또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이에 관한 여러 선현들의 설을 모아 책으로 엮어내는 등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성리학적 견해는 주로 스승의 학설을 따라 주리론(主理論)의 경향을 보였다.

경상북도 영주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성리유선(性理類選)』『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강목심법(綱目心法)』 등과, 문집인 『소고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嘯皐文集

[집필자]

이민식(李民植)

성명 : "박승임(朴承任)"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1予豈得已竝削奪官職竄黜遠方應漑竄會寧謹元竄江界篈竄鍾城上以鍾城方被兵命移配甲山○特旨以李墍爲長興府使朴承任爲昌原府使金應南爲濟州牧使皆盤據三司附會時論者應漑等特竄以代之○以鄭惟吉爲右相以鄭澈爲禮判以李友直爲
紀年便攷v11朴承任
紀年便攷v11朴承任訔五世孫進士珩子中宗丁丑生權五紀婿字重甫號嘯臯又西臯李滉門人居榮川中宗庚子生進俱中同年登明經科歴南床
紀年便攷v14麟壽林亨秀李若氷成遇沈苓盧守慎李熖丁熿權應挺權應昌李天啓權勿李湛安景祐李震黃博金振宗尹剛元尹忠元安馠朴承任金忠甲柳景深具壽聃宋純朴民獻柳昌門崔盖國
紀年便攷v16權春蘭安東人錫忠子中宗己亥生朴承任姪婿字彦晦號晦谷具鳯齡門人謁李滉諸學與柳成龍諸人講究疑義明宗辛酉進士宣祖癸酉登明經科歴翰林奉教輔德執
紀年便攷v24朴承任忠元曾孫牧使安禮子號南溪有至行仁祖丙子父喪中聞虜至奉母入東峽已而下城痛哭不已承任閑於兵法權井吉勤王時
記聞v1朴忠元趙士秀洪暹任說金祺丁應斗宋猉壽林亨秀南應雲尹仁恕尹鉉鄭惟吉李洪男李湛閔箕金澍李滉朴承任金獜厚李元祿盧守愼中宗大提學金安老蘇世讓金安國成世昌
小華龜鑑v4眉巖資憲諡文節閔箕見宣祖相臣錄盧守愼見宣祖相臣錄金澍字景霖號寓庵文壯禮參花山君閔起文字叔道監司號櫟庵朴承任字仲甫號嘯皐監司尹希聖字肩吾號■諡文壯吏正金麟厚字厚之號河西校理仁宗賓天哭歸不仕李元祿字廷瑞工儀議
歷代帝王紀年v01李德弘艮齋朴承任嘯皐琴蘭秀惺惺齋
國朝捷錄v01竜仁人監司竄卒見伩儒柳希春眉庵宣祖潛邸時受學字仁仲文節公金澍應霖遇庵公亮子見勳閔箕見相閔起文櫟庵源字朴承任重甫嘯皐訔五代孫珩子尹希聖字省吾耆子坡平人金麟厚齡子厚之乙巳士禍後不仕祠筆岩書院河西李元祿荇子工議力
郯述v02朴承任
晋陽誌進未幾災今有遺址南面書齋在鼎村里齋舍規制與東齋同亦朴承任所 建也使進士兪伯溫主訓誨經亂荒廢萬曆癸丑幼學 河
東國續修文獻錄v1相文景柳希春仁仲眉巖吏郞成春弟善山人監司文節金澍應霖寓庵公亮子安東人禮參閔起文櫟菴參議源子驪興人監司朴承任重甫嘯皐進士珩子潘南人海伯尹希聖省吾耆子坡平人吏正金麟厚厚之河西參奉齡子蔚山人校理文正配文廟李元祿
國朝人物志v2字道盛號勿巖咸昌人初從鄕賢朴承任學及遊退陶門慨然有志於性理之學行義著聞中外被薦爲參奉未幾卒年六十九以孝行贈左承旨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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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