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래(朴宗來)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종래(朴宗來)
미상∼1831년(순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
1790년(정조 14) 홍문관부수찬, 1794년 대사간에 재직중 김종수(金鍾秀) 사건의 처리가 소홀하였다고 하여 파직, 다음해 다시 대사간으로 복직되었다.
1801년(순조 1) 이조참의를 거쳐, 황해도관찰사에 재임중 부세의 개정에 노력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1803년 대사간‧이조참의를 역임하면서 공적을 쌓아 가선대부에 가자되었고, 다음해 홍문관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06년 비변사제조, 형조‧이조‧공조 판서, 대사간‧판윤 등 요직을 두루 거쳐, 다음해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1809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공로가 있어 숭정대부에 가자되고,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1년 공조‧병조‧이조판서, 판윤‧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판의금부사‧형조판서‧세자시강원좌부빈객‧공조판서‧원접사를 거쳐, 1813년 판돈녕부사‧판윤‧예조판서‧좌참찬을 역임하였다.
1816년 이조‧예조‧공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다음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819년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다음해 공조판서를 거쳐, 1821년 병조판서, 이듬해 세자시강원좌빈객이 되고, 1826년 판돈녕부사, 1830년 좌빈객을 거쳐, 1831년 판중추부사로 재직중 죽었다.
1790년(정조 14) 홍문관부수찬, 1794년 대사간에 재직중 김종수(金鍾秀) 사건의 처리가 소홀하였다고 하여 파직, 다음해 다시 대사간으로 복직되었다.
1801년(순조 1) 이조참의를 거쳐, 황해도관찰사에 재임중 부세의 개정에 노력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1803년 대사간‧이조참의를 역임하면서 공적을 쌓아 가선대부에 가자되었고, 다음해 홍문관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06년 비변사제조, 형조‧이조‧공조 판서, 대사간‧판윤 등 요직을 두루 거쳐, 다음해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1809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공로가 있어 숭정대부에 가자되고,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1년 공조‧병조‧이조판서, 판윤‧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판의금부사‧형조판서‧세자시강원좌부빈객‧공조판서‧원접사를 거쳐, 1813년 판돈녕부사‧판윤‧예조판서‧좌참찬을 역임하였다.
1816년 이조‧예조‧공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다음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819년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다음해 공조판서를 거쳐, 1821년 병조판서, 이듬해 세자시강원좌빈객이 되고, 1826년 판돈녕부사, 1830년 좌빈객을 거쳐, 1831년 판중추부사로 재직중 죽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純祖實錄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대표명 | 박종래(朴宗來) |
성명 | 박종래(朴宗來) |
성명 : "박종래(朴宗來)"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