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金鍾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885C218B1728X0 |
자(字) | 정부(定夫) |
호(號) | 몽오(夢梧) |
시호(諡號) | 문충(文忠) |
생년 | 1728(영조 4) |
졸년 | 1799(정조 2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청풍(淸風) |
활동분야 | 관료 > 권신 |
부 | 김치만(金致萬) |
증조부 | 김구(金構) |
처부 | 윤득경(尹得敬) |
출신지 | 서울 |
저서 | 『몽오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종수(金鍾秀)
1728년(영조 4)∼1799년(정조 23). 정조 때의 권신(權臣).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정부(定夫), 호는 진솔(眞率) 또는 몽오(夢梧). 서울 출신.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자이고, 시직(侍稷) 김치만(金致萬)의 아들이며, 교리 윤득경(尹得敬)의 사위이다.
1768년(영조 44)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홍문관부수찬을 지내고, 왕세손을 시강원필선으로 성실히 보좌하였다.
이때 외척의 정치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
1772년에는 청명(淸名)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하여 사림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가 드러나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에 의해 조정(趙晸)‧김치인(金致仁)‧정존겸(鄭存謙)‧이명식(李命植) 등과 함께 그 지도자로 지목되어 경상도 기장현의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방면되었다.
영조가 죽자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그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치고,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에 대제학에 올랐고, 그뒤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789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1792년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올라와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자, 예전에 정조와 대담하였던 내용인 “순(舜)‧주공(周公)과 같은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리로서 부모를 섬김이 효도”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 논의를 가라앉혔다.
다음해에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1794년에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을 다시 주장한 남인 채제공(蔡濟恭)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의리를 굽히지 않음으로써 정조의 두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어 평해에 유배, 남해에 이배되었다가 그해에 치사(致仕)하여 봉조하가 되었다.
순조 때에는 척신인 김구주(金龜柱) 및 심환지(沈煥之)들과 당파를 이루어 정조를 기만하고 뒤에서 그 치적을 파괴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하여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곧 회복되기도 했다.
1802년(순조 2)에 유언호(兪彦鎬)와 함께 정조묘정에 배향되었다. 임성주(任聖周)‧윤시동(尹蓍東)‧김상묵(金尙黙) 등과 친하게 교유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경술(經術)로써 일세를 풍미하였다 한다.
정조는 윤시동‧채제공과 더불어 3인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였다.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을 찬진하였으며, 저서로는 『몽오집』이 있다.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자이고, 시직(侍稷) 김치만(金致萬)의 아들이며, 교리 윤득경(尹得敬)의 사위이다.
1768년(영조 44)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홍문관부수찬을 지내고, 왕세손을 시강원필선으로 성실히 보좌하였다.
이때 외척의 정치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
1772년에는 청명(淸名)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하여 사림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가 드러나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에 의해 조정(趙晸)‧김치인(金致仁)‧정존겸(鄭存謙)‧이명식(李命植) 등과 함께 그 지도자로 지목되어 경상도 기장현의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방면되었다.
영조가 죽자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그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치고,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에 대제학에 올랐고, 그뒤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789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1792년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올라와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자, 예전에 정조와 대담하였던 내용인 “순(舜)‧주공(周公)과 같은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리로서 부모를 섬김이 효도”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 논의를 가라앉혔다.
다음해에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1794년에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을 다시 주장한 남인 채제공(蔡濟恭)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의리를 굽히지 않음으로써 정조의 두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어 평해에 유배, 남해에 이배되었다가 그해에 치사(致仕)하여 봉조하가 되었다.
순조 때에는 척신인 김구주(金龜柱) 및 심환지(沈煥之)들과 당파를 이루어 정조를 기만하고 뒤에서 그 치적을 파괴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하여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곧 회복되기도 했다.
1802년(순조 2)에 유언호(兪彦鎬)와 함께 정조묘정에 배향되었다. 임성주(任聖周)‧윤시동(尹蓍東)‧김상묵(金尙黙) 등과 친하게 교유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경술(經術)로써 일세를 풍미하였다 한다.
정조는 윤시동‧채제공과 더불어 3인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였다.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을 찬진하였으며, 저서로는 『몽오집』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夢梧集
本庵集
恩坡散稿
正祖實錄
純祖實錄
夢梧集
本庵集
恩坡散稿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명 : "종수(鍾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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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