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규(閔泳奎)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C601ADDCB1847X0 |
자(字) | 경오(景五) |
생년 | 1846(헌종 12) |
졸년 | 1922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민경호(閔璟鎬) |

[관련정보]
[상세내용]
민영규(閔泳奎)
1846년(헌종 12)∼1922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오(景五). 의정부의정대신 민경호(閔璟鎬)의 아들이다.
1875년(고종 1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를 거쳐 설서(說書)‧수찬(修撰)‧장령(掌令)‧교리(校理)‧응교(應敎)를 지냈다.
1876년 병조정랑, 1879년 병조참판, 1881년 이조참의, 1882년 형조참판‧예조참판을 지냈다.
1885년 외관직으로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1888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1890년 예조판서‧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1892년 이조판서가 되었고, 경기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1894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갑오경장으로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이 조직되자 면직되었다.
1897년 다시 기용되어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훈이등팔괘장(勳二等八卦章)‧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았고, 1906년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에 올라 각사(各司)의 도제조(都提調)를 겸임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한 뒤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하사금(下賜金) 5만원을 받았다.
1875년(고종 1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를 거쳐 설서(說書)‧수찬(修撰)‧장령(掌令)‧교리(校理)‧응교(應敎)를 지냈다.
1876년 병조정랑, 1879년 병조참판, 1881년 이조참의, 1882년 형조참판‧예조참판을 지냈다.
1885년 외관직으로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1888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1890년 예조판서‧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1892년 이조판서가 되었고, 경기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1894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갑오경장으로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이 조직되자 면직되었다.
1897년 다시 기용되어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훈이등팔괘장(勳二等八卦章)‧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았고, 1906년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에 올라 각사(各司)의 도제조(都提調)를 겸임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한 뒤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하사금(下賜金) 5만원을 받았다.
[참고문헌]
日省錄
承政院日記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總督府印刷局, 1910)
朝鮮紳士寶鑑
承政院日記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總督府印刷局, 1910)
朝鮮紳士寶鑑
[집필자]
오세창(吳世昌)
명 : "영규(泳奎)"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