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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李昰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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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자(字)시백(時伯)
호(號)석파(石坡)
시호(諡號)헌의(獻懿)
봉호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생년1820(순조 20)
졸년1898(광무 2)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족
이구(李球)
출신지서울

[상세내용]

이하응(李昰應)
1820년(순조 20)∼1898년. 조선 왕족‧정치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서울 출신.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넷째아들이며, 조선 제26대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렸다.
1. 가계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낙박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었다.

21세가 된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철종 때에는 안동김씨가 세도권을 잡고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千喜然)하정일(河靖一)장순규(張淳奎)안필주(安弼周)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의 생활을 하였다.

또,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으니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2. 고종 즉위와 수렴청정
그는 시정인과 어울려 지낸 이러한 호신생활을 통하여 서민생활을 체험하였으며, 국민의 여망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난세의 뛰어난 정략가로 장차 국정을 요리할 식견을 소지하고 있었던 그는 왕궁내의 최고 어른으로 익종비(翼宗妃)였던 조대비(趙大妃)와 연줄을 맺고 있었다.

안동김씨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조대비의 친조카 승후군(承侯君) 조성하(趙成夏)와 친교를 맺고, 그 자신이 조대비와의 인척관계를 내세워 조대비에게 접근하여 장차 후계자 없이 돌아갈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그의 둘째아들 명복(命福: 고종의 兒名)을 지명하기로 묵계를 맺어두었다.

1863년 12월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이하응의 아들 이명복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자는 원로대신 정원용(鄭元容)의 발의를 채납하여,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흥선군흥선대원군으로 봉하여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요람하게 되었다.
3. 개혁정치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며, 밖으로는 침략적 접근을 꾀하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을 뒷받침하는 조직이 없는 지방 양반토호들의 발호를 두둔하는 기관으로 화한 서원(書院)을 대폭 정리하였다.

또한, 토색과 주구에 힘쓰는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무토궁방세(無土宮房稅)의 폐지, 양반‧토호의 면세전결의 철저한 조사와 징세, 무명잡세(無名雜稅)의 폐지, 진상제도(進上制度)의 폐지, 은광산의 개발허용 등 경제‧재정개혁을 단행하였다.

또한, 군포제(軍布制)를 호포제(戶布制)라는 균일세(均一稅)로 개혁하여 강제로 양반도 세부담을 지도록 하였다. 사회의 악습개량에 힘쓰고 복식을 간소화하였으며 사치를 금하였다. 그리고 『대전회통』『육전조례(六典條例)』『양전편고(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또한, 의정부를 부활하였으며 비변사(備邊司)를 폐하고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정무(政務)와 군무(軍務)를 분리하여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맡게 하고 국방을 강화하였다.

한편, 왕권을 드러내고자 경복궁 중건의 대역사를 착수하였다. 이를 위하여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문세(門稅)를 거두었으며, 소유자에 관계없이 전국에서 거목(巨木)‧거석(巨石)을 징발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국민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민심수습을 위한 대출척(大黜陟), 당쟁의 본거지 정리, 국가재정의 질서확립, 경제개혁과 행정개혁 등으로 세도정치의 폐해를 광정(匡正)함에 큰 공을 세웠다.
4. 실책과 축출
그러나 경복궁 중수의 강행과 더불어 천주교도 박해는 그의 정치생명에 타격을 가져다주었다.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해온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에 흥미를 가지고 천주교도와의 제휴를 꾀한 일도 있었으나, 도리어 정적들에게 이용되어 그의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여 천주교도 박해령을 내려 전후 6년간(1866∼1872)에 걸쳐 8천여명의 천주교도를 학살하는 대박해를 감행하였다.

한편, 프랑스의 천주교도학살을 구실로 무력을 동원하여 침공을 시도한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사건(General Sherman號事件)을 구실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의 군사적 도전을 강력한 지도력을 발동하여 극복하였고 쇄국양이(鎖國壤夷)의 정책을 고수하였다.

이리하여 구미열강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도발을 극복할 수 있었으나, 쇄국의 강화는 결과적으로 조선왕조의 세계사와의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지연시키는 결과도 가져왔다.

그는 척족(戚族)의 세도를 봉쇄하고자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천거로 영락한 향반 여흥민씨(驪興閔氏) 집안에서 고종의 비를 맞이하게 하였던 것이나, 명성황후완화군(完和君)의 문제로 사이가 갈라져 일생을 두고 구부간에 화합될 수 없는 정치적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장성하여 친정(親政)을 바라는 고종을 움직여 대원군 축출공작을 추진하여 마침내 최익현(崔益鉉)대원군탄핵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정계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5. 재집권
1873년 11월대원군이 전용하던 창덕궁의 전용문을 사전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하니 그는 하야(下野)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양주 곧은골〔直谷〕로 은거하였다. 타의에 의해서 정계에서 축출된 대원군의 정권에 대한 집념과 명성황후에 대한 감정은 격렬하였으며, 그뒤 기회 있을 때마다 정계로의 복귀를 꾀하여 물의를 빚었다.

1881년 『조선책략(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민씨척족정부의 개화시책을 비난하는 전국유림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격렬히 전개되자, 그의 서장자(庶長子) 이재선(李載先)을 옹립하여 민씨척족정권을 타도하고 그의 재집정을 실현하려는 대원군계인 안기영(安驥永)의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에도 간여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봉량미(捧糧米)문제로 도봉소사건(都捧所事件)을 일으킨 난병(亂兵)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와 정국에 개입을 요청하자 그는 입궐하여 왕명으로 사태수습을 위임받고 출분(出奔)한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재집권하였다.
6. 명성황후와의 갈등과 은거
그러나 청국군의 개입으로 사태가 역전되면서 대원군은 청국으로 연행되어 바오딩(保定)에서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겪어야 하였다.

1885년 2월에 조선통상사무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같이 귀국한 뒤에도 정권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고 민씨척족정권타도의 기회를 노렸다.

민씨정부가 조러조약을 체결한 뒤 러시아와 가까워지게 되자 1886년 불평을 품은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1887년 큰 아들 이재황(李載晃)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고 시도하다 실패하였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동학세력과도 기맥을 통하기도 하였다.

청일전쟁을 앞두고 일본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을 부식하고자 내정개혁을 강요하며 온건개화세력과 손잡고 갑오경장을 일으켰을 때, 그를 궁중으로 영입하여 국왕으로부터 군국기무를 총괄하도록 위임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자신의 정치소신을 피력하자 그를 은퇴하게 하고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을 중심으로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하였다.

1895년에 정부는 그의 행동을 제약하는 대원군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을 제정하여 대소 신민과의 접촉을 제한하고 외국사신들과도 정부의 관헌입회하에만 만나도록 조치하였다.
7. 평가
유폐생활을 강요당하던 그가 다시금 궁중에 나타나 오랜 정적인 명성황후의 최후를 보게 되는 것은 을미사변 때의 일이다. 삼국간섭으로 궁지에 몰리는 일본을 본 뒤 친러노선을 취하게 되는 민씨와 친러정객의 득세에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권을 무력으로 돌이키고자 무도하게도 정치낭인들과 일본병을 동원하여 궁중을 습격할 때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입궐의 명색을 꾸미기 위하여 은거중이던 그를 받들고 경복궁에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친일내각을 세우며 대원군 러시아의 기민한 반격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에 의하여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고 친러정부가 정권을 다시 잡게 되자 대원군양주 곧은골로 돌아와 다시 은거하게 되었다.

죽은 뒤 부대부인 민씨와 더불어 공덕리에 안장되었다. 남달리 정권에 집착하여 명성황후와 대립하게 된 생애 후반에는 정치노선이 변화무상하였으나 고종초 10년간의 집정은 강직한 성격과 과감한 개혁정치로 내치에 실적을 올렸고, 서구침략세력의 침략적 접근에서 민족을 수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와 세계사 대세에 어두운 나머지, 근대사의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여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서화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高宗紀事
陰晴史
續陰晴史
近世朝鮮政鑑
大韓季年史
韓國痛史

[집필자]

이원순(李元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