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이택(沈履澤)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2ECC774D0DDB1832X0 |
자(字) | 치은(稚殷) |
생년 | 1832(순조 32)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청송(靑松)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심의면(沈宣冕) |
생부 | 심의린(沈宣隣) |
외조부 | 이로(李魯) |
[관련정보]
[상세내용]
심이택(沈履澤)
1832년(순조 3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치은(稚殷). 심의린(沈宣隣)의 아들로 심의면(沈宣冕)에게 입양되었다. 이로(李魯)의 외손이다.
1857년(철종 8) 왕대비의 5순(五旬)을 경축하는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등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1864년(고종 1) 의주부윤으로 재직당시 부당한 취재(聚財)로 인하여 아버지 심의면과 함께 암행어사 이응하(李應夏)에게 적발당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삼사가 모두 중벌을 주장함으로써 아버지 심의면은 찬배지전(竄配之典), 그는 가극지전(加棘之典)에 처하여져 유배당하였다.
1873년에 방면되어 1874년 2월에 이조참의에 올랐다가 같은해 7월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임명되어 정사 이회정(李會正), 서장관 이건창(李建昌) 등과 함께 이듬해 4월 청나라를 다녀왔다.
1876년에는 성균관대사성에 올랐으며, 다음해 11월에는 개성부유수의 외관직에 나아갔으며, 1878년에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78년 8월 사계(辭陛)한 이래 1880년 12월까지 3년여에 걸쳐 전라도 지방의 수반으로서 지방사정을 장계를 통하여 조정에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즉, 자연재해를 당한 전라도 지방민의 진휼문제, 서해안지방의 이양선 출몰상황, 수세(收稅)에 따른 애로사항 등을 일일이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조정에서 실정에 맞는 시정(施政)을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한편, 1880년에는 전라관찰사 재임시의 공을 인정받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특탁(特擢)되었다.
1882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같은해 8월에는 진하사은 겸 세폐사(進賀謝恩兼歲幣使)로 임명되어 그해 11월에 부사 민종묵(閔種黙), 서장관 정하원(鄭夏源)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1884년을 전후하여 이조‧예조‧형조‧호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민종묵‧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협판내무부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군무국협판(軍務局協辦)을 거쳐 8월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86년에는 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지냈다.
1887년에는 의정부우참찬‧시강원우빈객‧예문관제학을 지냈다. 문명이 있어서 교태전(交泰殿) 등 왕실의 중요건물 증축‧개축시에 제술관이나 서사관이 되기도 하였다.
1889년에는 홍문관제학‧내무독판을 거쳐 다음해에는 형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 등의 요직을 다시 거쳤다. 그해 9월에는 일본국사신을 접견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대일본외교에도 종사하였다.
1891년에는 시강원의 좌부빈객을 거쳐 좌빈객에 올랐다.
1857년(철종 8) 왕대비의 5순(五旬)을 경축하는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등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1864년(고종 1) 의주부윤으로 재직당시 부당한 취재(聚財)로 인하여 아버지 심의면과 함께 암행어사 이응하(李應夏)에게 적발당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삼사가 모두 중벌을 주장함으로써 아버지 심의면은 찬배지전(竄配之典), 그는 가극지전(加棘之典)에 처하여져 유배당하였다.
1873년에 방면되어 1874년 2월에 이조참의에 올랐다가 같은해 7월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임명되어 정사 이회정(李會正), 서장관 이건창(李建昌) 등과 함께 이듬해 4월 청나라를 다녀왔다.
1876년에는 성균관대사성에 올랐으며, 다음해 11월에는 개성부유수의 외관직에 나아갔으며, 1878년에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78년 8월 사계(辭陛)한 이래 1880년 12월까지 3년여에 걸쳐 전라도 지방의 수반으로서 지방사정을 장계를 통하여 조정에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즉, 자연재해를 당한 전라도 지방민의 진휼문제, 서해안지방의 이양선 출몰상황, 수세(收稅)에 따른 애로사항 등을 일일이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조정에서 실정에 맞는 시정(施政)을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한편, 1880년에는 전라관찰사 재임시의 공을 인정받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특탁(特擢)되었다.
1882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같은해 8월에는 진하사은 겸 세폐사(進賀謝恩兼歲幣使)로 임명되어 그해 11월에 부사 민종묵(閔種黙), 서장관 정하원(鄭夏源)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1884년을 전후하여 이조‧예조‧형조‧호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민종묵‧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협판내무부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군무국협판(軍務局協辦)을 거쳐 8월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86년에는 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지냈다.
1887년에는 의정부우참찬‧시강원우빈객‧예문관제학을 지냈다. 문명이 있어서 교태전(交泰殿) 등 왕실의 중요건물 증축‧개축시에 제술관이나 서사관이 되기도 하였다.
1889년에는 홍문관제학‧내무독판을 거쳐 다음해에는 형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 등의 요직을 다시 거쳤다. 그해 9월에는 일본국사신을 접견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대일본외교에도 종사하였다.
1891년에는 시강원의 좌부빈객을 거쳐 좌빈객에 올랐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國朝榜目
高宗時代史 1∼3(國史編纂委員會, 1970)
日省錄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國朝榜目
高宗時代史 1∼3(國史編纂委員會, 1970)
[집필자]
박맹수(朴孟洙)
명 : "이택(履澤)"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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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