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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치상(閔致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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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양(景養)
호(號)하당(荷堂)
시호(諡號)문목(文穆)
생년1825(순조 25)
졸년1888(고종 25)
시대조선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용현(閔龍顯)
5대조민유중(閔維重)

[상세내용]

민치상(閔致庠)
1825년(순조 25)∼1888년(고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양(景養), 사호(賜號)는 하당(荷堂).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5대손이며, 민용현(閔龍顯)의 아들이다.

1845년(헌종 11) 전강(殿講)에서 수석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849년 홍문관수찬에 임용되었고, 1850년 8월 진하사은 겸 세폐사(進賀謝恩兼歲幣使)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56년(철종 7) 홍문관부응교예방승지, 1859년 성균관대사성, 이듬해 홍문관제학을 역임, 이어 도승지에 올랐다.

1863년 철종이 죽은 뒤 영의정 김좌근(金佐根)과 함께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의 전교(傳敎)를 받들고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이명복(李命福: 고종)을 잠저(潛邸)로부터 궁궐까지 봉영(奉迎), 시위(侍衛)하였다.

1866년 이조참판을 거쳐 1867년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가 되었는데, 그 재임중인 1868년 오페르트(Oppert, E.)의 남연군묘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이 발생하였다.

그뒤 1870년 11월까지 공충감사(公忠監司)를 잉임(仍任), 같은해 12월 형조판서에 승진하였고, 1871년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두번째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판서공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재임중 1873년 수원유수 민승호(閔升鎬)와 직임을 상환(相換)하였다.

1874년 호조판서가 되어 시강원좌부빈객(侍講院左副賓客)을 겸임, 1876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까지 겸하였다.

1878년 이조판서를 거쳐 1881년 제도개편 때 전선사당상(典選司堂上)이 되었고,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척족(閔妃戚族)으로 난군에게 피습, 가옥을 파괴당하였다.

그뒤 1885년 강원도관찰사에 부임, 환곡의 폐해로 인한 원주 지방민의 민요를 겪었다.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참고문헌]

日省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집필자]

이완재(李完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