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규(趙雲逵)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C6B4ADDCB1714X0 |
자(字) | 사형(士亨) |
시호(諡號) | 충간(忠簡) |
생년 | 1714(숙종 40) |
졸년 | 1774(영조 50)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양주(楊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영국(趙榮國) |
[상세내용]
조운규(趙雲逵)
1714년(숙종 40)∼1774년(영조 5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사형(士亨). 행이조판서 조영국(趙榮國)의 아들이다.
1740년(영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예문관검열이 된 뒤 지평‧정언, 홍문관의 부수찬‧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45년 검상‧부교리를 거쳐, 강원도어사로 다녀와 관동 지방의 기근상(飢饉相)을 보고하고 진구책(賑救策)의 시급함을 건의하였다.
그뒤 교리‧장령‧헌납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749년 보덕에 이어 응교가 되었다.
이듬해 사간‧겸필선(兼弼善)을 거쳐, 1751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좌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도승지를 역임한 뒤 1754년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나주의 객사(客舍)에 조정에는 간신들이 득실거리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어 장차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괘서(掛書)가 나붙어 민심이 흉흉하자 직접 현장에 달려가 범인 색출을 진두지휘하였으며, 마침내 소론 윤지(尹志)일당을 일망타진한 뒤 추국(推鞫)하여 처단하였다.
이어서 1756년 평안도관찰사‧이조참판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1759년 호조판서가 된 뒤 병조판서와 판윤‧예조판서‧형조판서‧함경도관찰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766년 다시 호조판서가 되어 진연도감당상(進宴都監堂上)을 겸하였다.
이듬해 좌참찬으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고, 이어 교동수사(喬桐水使)‧판의금부사‧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거쳐 1772년 다시 호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740년(영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예문관검열이 된 뒤 지평‧정언, 홍문관의 부수찬‧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45년 검상‧부교리를 거쳐, 강원도어사로 다녀와 관동 지방의 기근상(飢饉相)을 보고하고 진구책(賑救策)의 시급함을 건의하였다.
그뒤 교리‧장령‧헌납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749년 보덕에 이어 응교가 되었다.
이듬해 사간‧겸필선(兼弼善)을 거쳐, 1751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좌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도승지를 역임한 뒤 1754년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나주의 객사(客舍)에 조정에는 간신들이 득실거리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어 장차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괘서(掛書)가 나붙어 민심이 흉흉하자 직접 현장에 달려가 범인 색출을 진두지휘하였으며, 마침내 소론 윤지(尹志)일당을 일망타진한 뒤 추국(推鞫)하여 처단하였다.
이어서 1756년 평안도관찰사‧이조참판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1759년 호조판서가 된 뒤 병조판서와 판윤‧예조판서‧형조판서‧함경도관찰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766년 다시 호조판서가 되어 진연도감당상(進宴都監堂上)을 겸하였다.
이듬해 좌참찬으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고, 이어 교동수사(喬桐水使)‧판의금부사‧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거쳐 1772년 다시 호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耳溪集
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耳溪集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명 : "운규(雲逵)"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