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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급(尹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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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유(景孺)
호(號)근암(近菴)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697(숙종 23)
졸년1770(영조 46)
시대조선중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세수(尹世綏)
5대조윤두수(尹斗壽)
저서『근암집』
저서『근암연행일기』

[상세내용]

윤급(尹汲)
1697년(숙종 23)∼1770년(영조 4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유(景孺), 호는 근암(近菴).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5대손이며, 황해도관찰사 윤세수(尹世綏)의 아들이다.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의 문인이다.

1725년(영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시권(試券) 비봉(祕封) 중에 나이와 본관을 쓰지 않아 격식에 위배됨으로써 탈락하게 되었으나, 헌납 채응복(蔡膺福)의 상소로 구제되었다.

1727년 설서가 된 뒤 정언지평수찬교리를 역임하고, 1734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이조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전주권(銓注權)을 독점하여 불법을 자행함을 비난하다 파직되었다.

1736년 사간으로 재기용된 뒤 집의검상부응교를 역임하고, 이듬해 교리로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우부승지대사간을 역임하고, 1741년 대사성이 되어 유생의 기강쇄신과 학풍의 진작에 노력하였으나, 유생들이 사원(祠院)의 훼철에 반대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써 이조참의로 체직되었다.

1744년 인사행정의 잘못으로 일신현감(一新縣監)으로 좌천되었다가, 1746년 부제학이 되어 동의금부사한성좌윤을 역임하고,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부사청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참판이 되었으며, 1749년 이조판서 정우량(鄭羽良)이 그의 당(黨)인 이창수(李昌壽)이조참의로 삼으려는 것을 반대하다 홍원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다시 부제학으로 기용된 뒤, 예문제학형조판서개성유수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대사헌에 이르렀다.

이때 문무식년회시(文武式年會試)에서 왕의 소패(召牌)를 어겨 도배(徒配)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63년 참찬이 된 뒤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영의정 신만(申晩)의 아들 신광집(申光輯)의 초사(初仕)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우참찬이 되었다. 이후 이조판서판의금부사한성판윤예조판서형조판서좌참찬을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는 준급한 언론으로 계속하여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 자주 파직 혹은 좌천되었으나 모두 의로운 주장이었기 때문에 즉시 서용되고는 하였다.

특히, 글씨에 뛰어나 독특한 그의 서체를 이룩하였다.

저서로는 『근암집』『근암연행일기』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典故大方
淸選考
槿域書畵徵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