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조흡(趙潝)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C870D761FFFFD1661X0
자(字)흡여(潝如)
시호(諡號)경목(景穆)
생년1591(선조 24)
졸년1661(현종 2)
시대조선중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수익(趙守翼)
저서『풍안군일기(豊安君日記)』
공신호정사공신(靖社功臣)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흡(趙潝)
1591년(선조 24)∼1661년(현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흡여(潝如). 교리 조수익(趙守翼)의 아들이다.

광해군 말에 등용되어 승문원정자가 되었고, 1623년(인조 1) 김류(金瑬)이귀(李貴) 등이 반정을 꾀함을 알고 이에 호응하여 포의(布衣)의 몸으로 이천(伊川)으로 가 방어사 이중로(李重老)와 군병을 모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

인조가 즉위하자 등극경과(登極慶科)의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으나 얼마 후에 파과(罷科)되어 쓰이지 않았으나 반정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녹훈되어 6품관에 초수(超授), 종부시주부가 되었다. 이어 장례원사평양구현감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강도(江都)인조를 호종하고 형조좌랑을 거쳐 청안현감으로 부임, 치적이 현저하여 현민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이어 창평현령을 역임하고, 부평도호부사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쳐 1644년에는 특지(特旨)로 공조참의에 발탁되었으며, 여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1646년 5월 다시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풍안군(豊安君)에 봉하여졌으며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그러나 부윤으로 재직중 술을 폭음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수어사 이시방(李時昉)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간성군수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고, 효종 때에는 한성부좌윤으로 있다가 1651년(효종 2) 범금인(犯禁人)을 수치(囚治)하지 못하고 탐학한다는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1654년부터 한성부도총부에서 근 7년간 몸담았다가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국조고실(國朝故實)에 밝았고, 저서로는 『풍안군일기(豊安君日記)』가 있다. 시호는 경목(景穆)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5-17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行奮忠贊謨靖社功臣嘉善大夫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豊安君趙公諡狀을 참고하여 생년 1591(선조 24)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