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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웅(兪命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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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영(仲英)
호(號)만휴정(晩休亭)
시호(諡號)온간(溫簡)
생년1653(효종 4)
졸년1721(경종 1)
시대조선중기
본관기계(杞溪)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석(兪晳)
조부유희증(兪希曾)

[상세내용]

유명웅(兪命雄)
1653년(효종 4)∼1721년(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중영(仲英), 호는 만휴정(晩休亭).

군수 유희증(兪希曾)의 손자이며,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유석(兪晳)의 아들이다.

1677년(숙종 3)에 사마시를 거쳐 1682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에 사헌부정언지평 등을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에 의하여 파직당하였다.

1694년에 갑술옥사로 서인들이 재집권하게 되자 사헌부장령으로 등용되었는데, 이때 이돈(李墩)이사상(李師常)을 탄핵하여 이돈을 좌천시켰다.

그뒤 사서를 거쳐 1696년 금성현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이로 말미암아 암행어사 여필용(呂必容)의 천거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듬해 보덕사간집의 등을 역임하고, 1699년 사은 겸 동지사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01년 형방승지로서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사사될 때 이를 반대한 소론을 숙청하였다.

1705년 우부승지를 거쳐 1707년 황해도관찰사승지 등을 역임하고, 1713년 도승지가 되고, 1716년 강원도관찰사청나라에 다녀왔다.

1718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1721년(경종 1) 공조판서가 되었다. 당론의 폐를 꺼려 조론(朝論)의 파당에 초연하였고 번잡한 교제를 피하였다.

특히, 시문에 능하고 해서를 잘 썼다. 시호는 온간(溫簡)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國朝榜目
兼山集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김상오(金相五)

명 : "명웅(命䧺)"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