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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채(朴世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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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화숙(和叔)
호(號)현석(玄石)
호(號)남계(南溪)
시호(諡號)문순(文純)
생년1631(인조 9)
졸년1695(숙종 21)
시대조선중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학자 > 유생
박의(朴猗)
조부박동량(朴東亮)
증조부박응복(朴應福)
외조부신흠(申欽)
저서『범학전편(範學全編)』
저서『시경요의(詩經要義)』
저서『춘추보편』
저서『남계독서기』
저서『대학보유변(大學補遺辨)』
저서『심경요해(心經要解)』
저서『학법총설(學法總說)』
저서『양명학변』
저서『남계수필록(南溪隨筆錄)』
저서『심학지결』
저서『신수자경편』
저서『육례의집』
저서『삼례의(三禮儀)』
저서『사례변절(四禮變節)』
저서『가례요해(家禮要解)』
저서『가례외편(家禮外編)』
저서『남계예설(南溪禮說)』
저서『남계시무만언봉사(南溪時務萬言封事)』
저서『남계연중강계(南溪筵中講啓)』
저서『남계기문(南溪記聞)』
저서『동유사우록』
저서『주자대전습유(朱子大全拾遺)』

[상세내용]

박세채(朴世采)
1631년(인조 9)∼1695년(숙종 21).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1. 가계와 수학
홍문관교리 박의(朴猗)의 아들이며, 모친은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박응복(朴應福)대사헌, 할아버지 박동량(朴東亮)형조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혈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7세 때인 1638년(인조 16)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1649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성균관생활 2년 만에 과거공부마저도 포기하였다. 원래 이이(李珥)『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으며, 이이를 존경하였다.
2. 이이의 문묘배향 주장
그 무렵 이이성혼(成渾)의 문묘종사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에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 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으므로 이에 분개하여 과시(科試)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에게서 배웠는데, 그의 큰아버지 박호(朴濠), 종부 박미(朴瀰)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하여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3. 관직과 유배생활
1659년 봄에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는데, 5월에 마침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크게 거론되게 되었다.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여 서인측의 이론가적 인물이 되었다.

그가 지은 『복제사의(服制私議)』는 남인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의 3년설의 부당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윤휴를 경책(警責)한 바 있는데, 이 서한을 계기로 두 사람의 교우관계가 단절되는 원인이 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기해복제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

이때 박세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楊根)지평(砥平)원주금곡(金谷)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4. 재등용
그러나 그가 다시 등용되던 1680년까지 6년간은 도리어 학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 기간에 『소학』『근사록』『대학』『중용』을 중심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설한 『독서기(讀書記)』를 비롯하여 『춘추』에 대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 추가한 『춘추보편(春秋補編)』과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유(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心學至訣)』 등을 저술로 남겼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집권층의 변화에 따라 그는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로부터 승정원동부승지공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684년 회이(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에서 박세채『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하여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하였으나, 끝내는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숙종 초기에 귀양에서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나아가 소론계 학자들과 학적 교류와 활동을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서 야인생활을 하였다.

이때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는 학구적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간중에 윤증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하여, 이른바 소론계의 학자들과 서신내왕이 많았으며,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밝히려는 저술 경향을 보인다. 『양명학변(陽明學辨)』『천리양지설(天理良知說)』을 비롯하여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신수자경편(新修自敬編)』 등은 이 시기에 저술한 중요한 저서들이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에는 정계의 영수격인 송시열이 죽고, 서인 내부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된 상태였으므로, 박세채우의정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이른바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다.

그는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 등과 더불어 이이성혼에 대한 문묘종사문제를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한 바 있다.

박세채는 위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내외로 다난한 시기에 태어나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라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몸소 겪는 명나라청나라의 교체라는 국제적 격동기였다.

다시 말하면 중화적(中華的) 천하가 무너지고 이적(夷狄)의 국가 청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는 이른바 역천패리(逆天悖理)의 위기의식이 만연된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공적인 활동이나 사적인 학구생활은 당시의 시대정신과 긴밀한 연관 속에 이룩된 측면을 볼 수 있다.
5. 학문과 저술
그의 학문은 이러한 17세기의 국내외의 상황과 관련하여 네가지 특성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정치적으로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붕당의 탕평론(蕩平論)이며, 둘째는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수호하는 일, 셋째는 이단(異端)을 비판하고 나아가 배척하는 일, 넷째는 사회규범으로서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대외정치면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복명반청(復明反淸)의 거사를 알고 이를 적극 지지하여 존주대의라는 정책과제를 제시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파당적 대립의 폐단을 깊이 깨닫고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禍)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라고 우려하여 그 나름의 탕평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존주대의의 정책과제는 김상헌과 관련할 때 그의 스승에게서 전수된 대외관(對外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적 세계가 무너지는 위기의식 속에서 도통수호(道統守護)라는 학적 과제에 대한 간접적인 인과관계성을 유추할 수 있다.

그의 도통수호의식은 그가 이미 『이학통록보집』을 저술하여 중국 유학의 학통을 밝혔고, 그와 아울러 방대한 『동유사우록』을 써서 동방의 도학연원을 밝혔던 것이다. 그의 공적은 수제자 김간(金幹)의 평과 같이 “계개(繼開)의 공과 찬술의 풍부함은 참으로 근대 유현(儒賢)에는 없다.”라고 자랑할만한 업적이다.

또한 그가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한 태도는 『양명학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고본대학(古本大學)』『대학문(大學問)』『치양지(致良知)』『주자만년정론(朱子晩年定論)』 등 양명의 이론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양명에 대한 비판은 도통수호라는 입장에 근거한 것이나 현실적으로는 그의 제자 정제두가 양명설(陽明說)을 신봉함으로써 사우(師友) 사이에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제두는 이보다 8년 전에 이미 『의고결남계서(擬古訣南溪書)』를 써서 “양명의 심설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고, 그뒤 여러 사우간에 논변이 있었던 만큼 그들의 스승으로서 논변을 질정(質定)하는 뜻에서 이러한 저술이 불가피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6. 예학사상과 저술
박세채의 많은 저술 가운데 예학에 관한 저술은 학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 ‘예학의 대가’라고 칭할만하다. 『남계선생예설(南溪先生禮說)』『육례의집(六禮疑輯)』 등은 예의 구체적 실천문제를 다룬 서술로서 과거에 보지 못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식절차까지 문제삼고 있다.

이러한 예학의 변용은 17세기 성리학의 예학적 전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예학의 구현이라는 오륜적 근거를 밝히는 학적 과제가 된다.

여말선초의 사상적 전환기에 제기되었던 불교의 멸륜성(滅倫性)을 극복하고 예에 의한 실천방법으로서 오륜은 매우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가례(家禮)』를 권장하고 『삼강행실도』『국조의례』 등의 간행은 일종의 범국민적 규범원리로서 예의식을 광역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비의 복(服)에 대하여 기년복‧삼년복을 주장하거나 또는 대공(大功)‧기년이어야 한다는 이른바 예송(禮訟)은 파당적 대립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으나 문제는 대립의 성격이 예에 대한 기본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립적 성격은 분명히 예학의 구현이라는 유학의 기본과제에 대한 새로운 검토이며 예학적 전개라는 차원이 이해된다.

그의 예학적 전개는 『육례의집』『변례질문(變禮質問)』 등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그의 견해는 역시 문인 김간의 『동방예설(東方禮說)』에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정제두의 글에서 고례(古禮)를 존중하고 간례(簡禮)를 강조하면서 이이성혼과 더불어 박세채의 예설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예설은 위의 학적 계통의 선상에서 정제두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저술로는 『범학전편(範學全編)』『시경요의(詩經要義)』『춘추보편』『남계독서기』『대학보유변(大學補遺辨)』『심경요해(心經要解)』『학법총설(學法總說)』『양명학변』『남계수필록(南溪隨筆錄)』『심학지결』『신수자경편』『육례의집』『삼례의(三禮儀)』『사례변절(四禮變節)』『가례요해(家禮要解)』『가례외편(家禮外編)』『남계예설(南溪禮說)』『남계시무만언봉사(南溪時務萬言封事)』『남계연중강계(南溪筵中講啓)』『남계기문(南溪記聞)』『동유사우록』『주자대전습유(朱子大全拾遺)』 등이 있는데, 단행본으로 유포되고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古鮮冊譜
朝鮮儒學史(玄相允, 1949)
資料韓國儒學史草稿(李丙燾, 1959)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집필자]

김용걸(金容傑)

성명 : "박세채(朴世采)"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4配享南九萬領議政文忠公○在十世孫朴世采左議政文純公尹趾完右議政忠正公崔錫鼎領議政文貞公
紀年便攷v23孫載海敏格子字叔涵號雙湖又知恥齋朴世采門人以經明行修屢薦官止副率年六十三卒贈執義兼進善
紀年便攷v23也李景奭奉使赴燕格以野服騎牛餞于弘濟院袖詩贈之曰天下有山吾已遯城中無主一曰帝子誰朝肅宗庚申卒年八十四朴世采書其銘旌曰大明處士英祖朝特贈吏議官誥書崇禎年號
紀年便攷v25至家乃生故小字以聖賚字英甫號尤菴又華陽洞主金長生門人卒業於金集又執贄於金尙憲氣像嚴正學問純篤與宋浚吉朴世采金益勳金萬基金慶餘鄭瀁金壽興金壽恒從遊仁祖癸酉生壯太學士崔鳴吉以易義一陰一陽之謂道試士見其文曰當作鳴
紀年便攷v25正司業尙衣院正上疏每引江都事稱死罪臣宋時烈甚契許後以不絶尹鐫責之其子極謁墓文於時烈而出其擬書時烈只據朴世采所爲狀不甚褒揚以此轉生層激兩家遂成睽離書法甚工名入筆苑顯宗己酉卒年六十推恩贈左相諡文敬肅宗丙申追奪官
紀年便攷v27使之出入經筵上曰大臣入侍經學之士蔫進宜矣領議政金壽恒曰前執義尹拯家學有素踐履誠實卓照為士論所推重至於朴世采之經術學行亦與尹拯并稱矣鼎重曰朴世来曽被罪己蒙叙且李翔則方在罪籍先朝亦當别為招延雖不帶講職亦令入侍筵
紀年便攷v27領府事宋時烈上䟽請尊孝宗廟為世室上命大臣諸宰雜議議皆同而猶儒臣朴世采難之上曰孝宗大王聖德神功卓越千古實合於永世不遷遂命禮官舉行刑曺判書金德遠上䟽曰孝宗世室己卜告廟之日亦
紀年便攷v27為不正之意也於是閔鼎重金壽恒䓁亦以為今以威化回軍之大義不入於諡號為嫌欲奉皇朝加上之禮臣䓁於此旡客别議朴世采獨曰太祖回軍假借大義以濟其化家為國之業未必出於尊周之誠今日臣子雖不敢指斥亦不必表章上重時烈議下教曰太
紀年便攷v27墾田圡新設殘鎮旣不足以禦賊而反開賊路必有犯越之患諸臣多以尙運言為是金壽恒䓁請先設二鎮上従之○吏曺㕘議朴世采上䟽進心學㫖訣世采取鄭述所編心經發揮趙翼所撰持敬圖說損益成書○正言朴泰維上䟽論追加太祖諡號之非右議政
紀年便攷v27時烈自驪江赴名至京江邀朴世采諭以同入之意世采樂聞遂卽入亰日不離時烈恭執子弟之禮世采曰尹子仁可招而来時烈曰子仁肯来否世采曰先生與小
紀年便攷v27拯與朴世采書曰士類之貳於尤翁者有何私怨於尤翁不過尤翁所為不能厭於人心故人心不服也又日情義雖絶而猶有兄我負人之心
紀年便攷v27戊辰十四年康煕二十七年副提學崔錫鼎上䟽陳烕仍進短箴六篇上嘉納之命賜虎皮○吏曺判書朴世采承召赴朝進袖剳時張氏寵傾後宮東平君抗崇善君徵子恃寵憑奥出入非時國言喧藉世采進袖剳曰三代之君能修其政者
紀年便攷v27者命宗府覈出全平君漷主其事坐不卽覈命下吏鞫問世采因此不安出城待罪領議政南九萬右議政呂聖齊請對九萬奏曰朴世采方出城待罪臣窃以為聖明䖏分過常至於提調未嘗有宗親除拜之䂓物情之朱安有所以也且殿下未有儲嗣當此時近宗頗
紀年便攷v29道中進士肅宗丁卯以直長登增廣歷兩司春坊以淮陽府使杖殺犯馬儒生因臺啓被拿瘐死獄中信一弟晦一字顯叔號勿齋朴世采門人以經學薦官止禁都母喪哀毀而卒
紀年便攷v29柳貴三字道卿號守真堂朴世采門人世釆以為晩得二士貴三與崔敏學也二人皆於此學用力着實
紀年便攷v29李世瑍尙伋曾孫字季章號栗齋朴世采門人甞自賛其像曰白髮■如憂道之深耶眉睫萬觓憂國之忱耶因號二憂堂英祖在東宫時為師傳謚孝獻
東國歷代總目v02癸亥召致宋時烈及儒臣朴世采等○閔鼎重贊上志旁招賢俊勵精圖治尋以論議擕貳罷歸○庚申以後西人當國而少輩持論多與先進角立金錫胄金萬基
東國歷代總目v02甲申從祀文純公朴世采于文廟○京外儒生曾請從祀而不允至是上謂文純嘗爲蕩平袪黨之論特許之諸臣多爭執
見睫錄v1左相文純公朴世采領相文忠公南九萬領相文貞公崔錫鼎左相忠正公尹趾完
記聞v1閔鼎重庚申以後李尙眞金錫胄南九萬呂聖齊趙師錫鄭載嵩李䎘李端夏己巳以後睦來善特拜金德遠特拜閔黯甲戌以後朴世采尹趾完主文金錫胄息菴閔點南九萬守李敏敍守金萬重辭南龍翼特除閔黯大臣圈點權愈朴泰尙○誅許堅等錄奮
記聞v1宋時烈上疏請以文元公金長生博議於搢紳館學又廣詢於方外章甫竢其無異說然後財度於古義而行之議于大臣及朴世采李翔尹拯判付內宋朝五賢升配殿內一款依宋領府事疏辭施行此時巨役似難輕議徐待年豐擧行勉齋黃氏竝與楊羅李
國朝捷錄v01鄭仁弘德遠荿庵左相力主廢母宋時烈文正公左相許穆和夫眉叟文正公朴世采和叔玄石文純公左相尹拯子仁明齋文成公左相權尙夏遂庵文純公左相
國朝捷錄v01胄息庵金得臣子公吏判栢谷父監司緻金昌協仲和農岩李端相女朴世堂西溪判書泰輔父父參判炡祖判書東善曾祖應川朴世采和叔南溪李匡師道甫圓橋金鎭圭達甫竹泉斗恒曾祖
國朝捷錄v01肅宗大王室領議政文簡公藥泉南九萬左議政文純公玄石朴世采右議政忠貞公東山尹趾完領議政文忠公崔錫鼎領議政忠貞公陋室柳尙運
郯述v04領相南九萬左相朴世采吏郞柳尙運右參贊兼主文朴泰尙吏議金万吉吏郞李徵明○行畐副學吳道一應敎金盛遇本館錄外趙泰采朴栦趙大壽南
社稷署都提調先生案朴世采 甲戌四月三十日
趙公家狀啓論載興鄙悖之狀請削抄選又 論參議申暻之盛陳文純公朴世采道德顯示從享 之意請罷職承嚴旨府君與同僚聯箚救之曰
文獻攷略v1以爲太字宜改題去之位版不書姓氏載於五禮儀其餘雖有誤有闕然太廟神主皆無粉面刮磨改題重難宜姑仍舊吏曹參議朴世采亦疏論太字不可不去時將加上太祖太宗徽號
文獻攷略v1旨李彦綱所啓以永寧殿祝式不齊有收議事而諸大臣皆有持難之意先正臣宋時烈之議雖若可以改而不爲明言先正臣朴世采之議亦持難端宗復位時謚冊文初有孝曾孫三字故相臣崔錫鼎獻議以爲永寧殿定宗
仁敬王后國恤謄錄n1-3책向 事 吏曹司憲府永昭殿翼陵 馬 一曹單子前執義朴世采尹拯等處祥後哭禮問議事京畿楊州公洪 道尼山地下去曹
仁敬王后國恤謄錄n1-3책改題一款永昭殿翼陵祥後上食時哭禮 與否問議于前執義朴世采則以爲卽者禮曹郞官又以恭靖位版改 題及永昭殿翼陵祥
仁敬王后國恤謄錄n1-3책三■節李翔尹拯朴世采而尹拯以遠地未及祥日之意二十三日引見時陳達不爲發送
仁敬王后國恤謄錄n1-3책府事宋時烈尼山地執義尹拯全義地司業 李翔楊州地司業朴世采處永昭殿禫後祭用樂一款收議事 京畿公洪等道下去曹郞
仁敬王后國恤謄錄n1-3책二日 朴司業問議 一曹啓曰發遣本曹郞廳問議于司業朴世采處則以爲臣前於位版 改題之議一徇謬守不敢有所仰對自
仁顯王后國恤謄錄n1-1책亦不合於疏說之意我東儒先所論亦多可 据而近世先正臣朴世采所論頗爲明白自朝家定制使之依禮 經行祭除服似宜矣上
孝懿王后國恤草日記言之乎不以緦看緦而以父喪服爲 重不失尊尊之義文純公朴世采曰行喪及下棺時當持改葬父 緦服以從小記之義蓋雖緦猶
追上謚號謄錄n1-1책人熟 講而處之伏惟上裁傳曰遣史官詢問於宋領府事 而朴世采等三臣處亦爲遣禮官問議可也
追上謚號謄錄n1-1책 辛酉八月二十八日 馬文 一曹單子楊州地前執義朴世采金義地執義李翔尼 山地前執義尹拯等處恭靖大王廟號追
追上謚號謄錄n1-1책啓曰恭靖大王追上廟號發遣郞廳問議于執義 李翔前執義朴世采前執義尹拯處則李翔以爲遠代 闕典此日追論有以見朝家
追上謚號謄錄n1-1책依例令兵曹題給何如啓依所啓施行 儒臣收議 一前執義朴世采以爲卽者禮曹郞官又以恭靖大王位版 改題及永昭殿翼陵
追上謚號謄錄n1-1책事宋時烈尼山地前執義 尹拯全義地司業李翔楊也前執義朴世采等處 文廟從享位次釐正牧議事公洪京畿等道下去曹郞
追上謚號謄錄n1-1책之禮似亦有據唯在聖明博詢而審處之伏惟上裁吏 曹參議朴世采以爲祖宗朝世室豫告之禮雖未及詳知旣以孝 宗大王功德
追上謚號謄錄n1-1책追上尊號賓廳會議時朴參議收議 一曹啓曰傳曰吏曹參議朴世采以臺論不得承牌云參禮曹郞廳 問議以啓事命下矣卽遣郞
龍城誌n1-7책縣監元士愼墓表左議政朴世采
重訂南漢志v1廡弘儒侯薛聡文成公安珦文敬公金宏弼文正公趙光祖文純公李滉文簡公成渾文正公宋時烈文純公朴世采在東北向東上
靑邱風雲v1朴世采號玄石尹拯號明齋金錫胄號息菴閔號老峯鄭維城號陶村金壽增號谷雲金壽興號退憂堂金壽恒號文
靑邱風雲v1恒李端夏李敏敍等咸宗宋時烈不與時議其號老論者以年位尊也趙持謙韓泰東等自成一黨以排勳戚自名淸流朴世采吳道一南九萬尹趾完朴泰維等助之世又稱之以少論初尹宣擧當江都虜亂與妻友約死身獨苟免悔過志學有儒林聲譽
東國續修文獻錄v1文左相誣廢坤宮竄死金德遠字子長號休谷原州人人文右相甲戌竄閔黯字長孺號叉湖驪興人文右相甲戌施律朴世采字和叔號玄石訔后逸左相文純尹趾完字叔麟號東山坡平人文右相忠正柳尙運字攸久號陋室寬后文領相
東國續修文獻錄v1南臺大官篇鄭仁弘瑞山人左相力主廢母刑宋時烈英甫尤庵恩津人左相許穆和夫眉叟陽川人右相朴世采和叔玄石潘南人左相尹拯子仁明齋坡平人右相權尙夏致道遂菴安東人左相
國朝人物志v1朴世采
國朝人物志v3希天號雲浦咸陽人爾徵子孝宗壬辰進士甲午文科肅宗丙寅拜右相戊辰吏判朴世采言近宗杭眷遇太偏領相南九萬言先朝待楨柟過厚不得其終爲鑑上盛怒聖齊繼進曰首相
國朝人物志v3察使處厚子四歲能綴文庚子進士壬戌文科以修撰廉察北道劾贓吏鍊民瘼以爲一道勸吏曹判書朴世采言事忤旨領相南九萬左相呂聖齊論救竝竄棘北邊受瀗詣臺草六啓請還收特補北靑判官
國朝人物志v3幼而卓犖雖顯而有勢者與之角不少懾遂痛刮磨習氣日孶孶劬業弱冠受學于尤菴宋時烈與南溪朴世采厚齋金幹直齋李箕洪講磨道義肅宗己巳仁顯后遜位德謙倡多士上疏甲戍戌上大
國朝人物志v3官至濟用奉事師事白休庵仁傑與栗谷李珥爲道義交希天天姿粹美未弱冠專意學問時南溪朴世采講道坡州希天就受業後與儉齋金楺癯溪權尙游爲同志禊每歲會講于南溪書院丙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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