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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閔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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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호여(皞如)
호(號)석호(石湖)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614(광해군 6)
졸년1687(숙종 13)
시대조선중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응협(閔應協)

[상세내용]

민희(閔熙)
1614년(광해군 6)∼1687년(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호여(皞如), 호는 설루(雪樓) 또는 석호(石湖). 참판 민응협(閔應協)의 아들이며, 민암(閔黯)이 형이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장령을 거쳐 1657년 보덕(輔德)으로 승진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1661년(현종 2)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경상도는 2만7000여명에 달하는 기황민(饑荒民)과 여병(癘病)에 신음하는 3,600여명의 환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곤민을 급히 진여곡을 풀어서 구제하니 도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듬해 승지가 되었고, 1663년 양주목사가 되었으나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사액치제(賜額致祭)때 전례(典禮)에 잘못이 있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곧 좌부승지로 복직되어 형조참의를 지내고, 166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668년 호조참판으로서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한성부판윤관상감제조공조이조형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70년 청사(淸使)를 보내는 반송사(伴送使)가 되었으며, 1671년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1675년(숙종 1) 국장도감당상(國葬都監堂上)이 되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판의금부사예조판서를 역임한 뒤 1677년 우찬성,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1680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원래 남인이었던 그는 숙종의 즉위 이후 남인의 득세로 그의 정계에서의 활약은 컸다.

특히, 송시열(宋時烈)을 영수로 하는 서인에 대한 의견차로 그는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이 되어 더욱 조정에 중용되었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 당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위리안치되었다.

그뒤 1686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김갑주(金甲周)

명 : "희(熙)"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郯述v02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