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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상(李一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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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함경(咸卿)
호(號)청호(靑湖)
시호(諡號)문숙(文肅)
생년1612(광해군 4)
졸년1666(현종 7)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명한(李明漢)
조부이정귀(李廷龜)

[상세내용]

이일상(李一相)
1612년(광해군 4)∼1666년(현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 영의정 이정귀(李廷龜)의 손자이며, 이조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다.

1628년(인조 6) 17세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어려서 벼슬을 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1633년 검열이 되고, 대교정언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가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또한 화의를 반대한 척화신으로서 이듬해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다시 위원으로 이배되었다. 뒤에 남노성(南老星) 등의 주장으로 풀려나 인조 말년에는 사간에 올랐으며, 1647년에는 창덕궁수리소도청으로 공이 있다 하여 당상관에 올랐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우승지에 발탁되어 총애를 입었으며, 이어서 대사간을 거쳐 1652년(효종 3) 도승지가 되었으나, 탄핵받은 특진관(特進官) 윤강(尹絳)을 신구(伸救)하다가 한때 파직되었으나 홍무적(洪茂績)의 신구로 복귀하였다. 이어 부제학대사간대사성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범금자(犯禁者)를 남의 청탁으로 석방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한때 다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54년 정조 겸 진하부사(正朝兼進賀副使)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청나라의 실정을 보고하여 효종의 북벌계획 수립에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도움을 주었다.

곧 이어 이조참판대사헌대사성 등의 청요직을 거쳐 1656년에는 부제학으로 실록수정청당상에 임명되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한때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1659년에는 대제학에 올라 문형(文衡)을 장악하였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에 차출되고, 찬집청당상(纂輯廳堂上)으로 『영릉지장(寧陵誌狀)』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예조참판으로서 대제학을 겸하였으며, 1660년(현종 1)에는 실록청당상으로 『효종실록』 편찬의 책임을 졌으나 이른바 미선사건(米船事件)으로 남인계열의 이지익(李之翼)의 탄핵을 받았다.

그뒤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 등을 지내고, 실록편찬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으며, 공조판서예조판서좌우참판호조판서를 거쳐 1666년에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죽었다.

이듬해 생전에 약방제조로서의 공이 인정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인계열이 편찬한 『현종실록』에서는 학술이나 재능도 없는 주정꾼으로 평하고 있으나, 서인계열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는 그의 할아버지‧아버지와 함께 3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낸 것은 수백년 사이에 없었던 일이라 하고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