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처윤(洪處尹)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64DCC98C724B1607X0 |
자(字) | 지임(之任) |
호(號) | 안분재(安分齋) |
생년 | 1607(선조 40) |
졸년 | 1663(현종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남양(南陽[唐])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홍명원(洪命元) |
외조부 | 윤민준(尹民俊) |
[상세내용]
홍처윤(洪處尹)
1607년(선조 40)∼1663년(현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지임(之任), 호는 안분재(安分齋).
부친은 경기관찰사 홍명원(洪命元)이며, 모친은 부호군 윤민준(尹民俊)의 딸이다.
1639년(인조 17)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40년 예문관검열, 1641년 감찰, 1643년 홍산현감(鴻山縣監)을 거쳐, 1646년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어 파방되자 삭직되었다.
1648년 복직되어 정언‧수찬을 역임하고, 1650년(효종 1) 응교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해 지평이 되어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였다. 교리가 되어서는 당쟁(黨爭)의 무해(無害)함을 진술하다가 삭직되었으나, 곧 배천군수(白川郡守)로 기용되어 선정을 베풀어 군민이 합심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1652년 보덕으로 승진되었고, 사인을 거쳐 이듬해 교리가 되어 사노(私奴)로서 충군(充軍)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내용의 소를 올렸으나 그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또, 효종이 옛 성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뜻을 알고자 『서전(書傳)』에 쓰여 있는 기형(璣衡: 천문을 관측하는 기계)을 만들어 바칠 것을 명하자 이것을 만들어 올려 많은 찬사를 받은 바 있고, 이로 인하여 직강‧수찬이 되었으나 곧 삭직되었다.
1654년 다시 보덕에 임명되어 직강‧교리가 되고, 1656년 금성군수(錦城郡守), 1658년 응교‧사간‧사인, 이듬해 수찬‧사간‧사예‧종부시정을 지냈다.
효종이 죽자 사인 겸 빈전도감도청이 되고, 이어 교리 겸 한학교수를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형조참의‧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63년 첨지중추부사‧예조참의를 지냈다.
부친은 경기관찰사 홍명원(洪命元)이며, 모친은 부호군 윤민준(尹民俊)의 딸이다.
1639년(인조 17)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40년 예문관검열, 1641년 감찰, 1643년 홍산현감(鴻山縣監)을 거쳐, 1646년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어 파방되자 삭직되었다.
1648년 복직되어 정언‧수찬을 역임하고, 1650년(효종 1) 응교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해 지평이 되어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였다. 교리가 되어서는 당쟁(黨爭)의 무해(無害)함을 진술하다가 삭직되었으나, 곧 배천군수(白川郡守)로 기용되어 선정을 베풀어 군민이 합심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1652년 보덕으로 승진되었고, 사인을 거쳐 이듬해 교리가 되어 사노(私奴)로서 충군(充軍)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내용의 소를 올렸으나 그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또, 효종이 옛 성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뜻을 알고자 『서전(書傳)』에 쓰여 있는 기형(璣衡: 천문을 관측하는 기계)을 만들어 바칠 것을 명하자 이것을 만들어 올려 많은 찬사를 받은 바 있고, 이로 인하여 직강‧수찬이 되었으나 곧 삭직되었다.
1654년 다시 보덕에 임명되어 직강‧교리가 되고, 1656년 금성군수(錦城郡守), 1658년 응교‧사간‧사인, 이듬해 수찬‧사간‧사예‧종부시정을 지냈다.
효종이 죽자 사인 겸 빈전도감도청이 되고, 이어 교리 겸 한학교수를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형조참의‧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63년 첨지중추부사‧예조참의를 지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갑주(金甲周)
명 : "처윤(處尹)"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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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