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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宋浚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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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명보(明甫)
호(號)동춘당(同春堂)
시호(諡號)문정(文正)
생년1606(선조 39)
졸년1672(현종 13)
시대조선중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이창(宋爾昌)

[상세내용]

송준길(宋浚吉)
1606년(선조 39)∼1672년(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영천군수(榮川郡守)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였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洗馬)에 제수된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內侍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직에 나갔다가 장인 정경세(鄭經世)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649년 김장생의 아들로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金集)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송준길도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진선(進善)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이해에 인조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그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집의이조참의 겸 찬선 등으로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으며, 1658년(효종 9) 대사헌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쳤다.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만 1)를 주장할 때 그를 지지하여 남인(南人)의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이후 우참찬대사헌좌참찬 겸 좨주찬선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단지, 1665년(현종 6)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이 역시 곧 사퇴하였다.

1673년 1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게 되고,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시킴으로써 남인이 정권을 장악, 1675년(숙종 1) 허적(許積)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해 김장생과 함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이 건의된 이래 여러 차례의 상소가 있은 다음 1756년(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 충현서원(忠賢書院)봉암서원(鳳巖書院)돈암서원(遯巖書院)용강서원(龍岡書院)창주서원(滄洲書院)흥암서원(興巖書院)성천서원(星川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어록해(語錄解)』『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이 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同春堂先生年譜
黨議通略
韓國黨爭史(成樂熏, 韓國文化史大系 Ⅱ, 1965)
李朝黨爭史硏究(姜周鎭, 서울大學校出版部, 1971)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호 : "동춘송준길(同春宋浚吉)"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人物志v3祖丙子召以諮議顯宗嗣位下旨持拜右尹未幾上疏言事忤時議三司交章請罷其職越九年同春宋浚吉言於上曰諰愛君憂國老而彌篤不可終棄遂拜左尹壬子卒贈參贊人物考子愭字伯仁
國朝人物志v3其人竝其里居年歲輒不忘治效大著孝宗曰予知李某經幄才以數百里生民爲念而已顯宗初服同春宋浚吉白上曰某有才局遂拜監司陞嘉善上同
國朝人物志v3至城中大懼尙逸堅臥不動遂退去前後首級百餘而嫌於自伐不以實聞故朝廷不能知也己丑爲掌令與同春宋浚吉劾金自點竟至流配出爲晉州牧使以輔德召之黃海監司金弘郁言事忤旨上大怒親鞫
國朝人物志v3觀察使奉母之官設壽宴以養獻納金錫胄與大司諫金宇亨誣以憑籍壽宴貪婪侈汰論罷又請拿鞫同春宋浚吉入對曰金澄久處臺閣仇怨盈世臣謂直臣受禍非國之福而壽親得罪亦傷孝理許積與群憾合勢請令本道
國朝人物志v3字子遠號喚醒齋廣州人參議士雄玄孫受業于同春宋浚吉之門肅宗乙卯進士文科以掌令上疏劾尹鑴之罪己巳以參議謫卒上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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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